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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옹 기자]
지난 4일, 중국 선양(심양, 瀋陽)에 왔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결정적 고리를 찾아, 580년 전 신숙주·성삼문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가는 요동 답사의 첫날이었다.
나는 뜻밖의 역사와 마주쳤다. 1445년 신숙주 일행이 이 도시를 지나갔을 때보다 약 200년 뒤, 또 다른 조선인이 이곳에 끌려와 8년(1637~1645)을 보내야 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병자호란(1636~1637)의 치욕이 낳은, 그러나 치욕 속에서 더욱 빛났던 비운의 왕세자다.
답사단의 중국 전문가 권오향 박사(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겸임교수) 릴게임사이트 가 일정을 짜며 소현세자의 거처였던 심양관(고려관) 터 일대 방문을 넣은 까닭이 있었다. 장리메이 선생의 통역과 현지 안내로 우리 셋은 선양 옛 성곽의 조양로(朝陽路) 동편 일대를 걸었다.
삼전도의 굴욕에서 심양관까지
바다이야기예시
▲ 조선 시대 소현세자 일행이 머물렀을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선양 고려관 터 일대에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적산가옥. 관리가 되지 않아 을씨년스럽게 낡아 있다.
릴게임바다신2
ⓒ 김슬옹
1637년 1월, 인조가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이른바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항복 의례를 올렸다. 조선 오백 년 역사에서 이보다 치욕 야마토게임하기 적인 순간이 있었을까?
그 치욕의 대가로 소현세자(1612~1645)는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뒷날의 효종) 부부와 함께 볼모가 되어 선양으로 끌려왔다. 1637년 4월 10일 선양에 도착한 세자 일행은 처음 동관(東館)에 머물다가, 5월 7일 청 태종이 새로 지어 준 심양관으로 옮겨갔다. 청나라에서는 이 건물을 '고려 바다이야기디시 관(高麗館)'이라 불렀다.
심양관은 대남문 북쪽 약 120미터 지점, 현재의 조양로 동편에 있었다. 세자와 대군의 가족, 세자시강원과 관원, 환관, 궁녀, 역관, 군관, 의원까지 합하면 무려 300여 명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인질의 규모가 상상 외로 컸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인질이면서 동시에 조선과 청 사이의 연락과 외교를 담당하는 사실상의 해외 상주 공관장 구실을 했다.
심양관의 원래 건물은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1907년 <심양지도>와 1924년 <최신심양지도>에 '고려관호동(高麗館胡同)'이라는 골목 이름이 정확히 남아 있었지만, 그 자리에는 이미 다른 건물들이 들어섰다.
우리가 찾아간 곳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지은 적산가옥이 남아 있었다. 만주 사변(1931) 이후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고 봉천(지금 심양에 편입)을 주요 거점으로 삼으면서, 이 일대에 일본식 건물들을 대거 지었던 것이다. 소현세자가 8년을 보낸 조선관 터 위에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이 덮어 씌워진 셈이다.
건물을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관리가 안 되어 많이 낡아 있었다. 1층 일부는 상가로 쓰이고 있었지만, 외부 벽은 갈라지고 건물 안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3월 초 선양의 찬바람이 건물 사이를 훑고 지나갈 때, 이 황량함이 오히려 소현세자의 8년간의 포로 생활을 말없이 보여 주는 듯했다. 권오향 박사가 말했다.
"여기가 정확히 고려관 자리는 아닐 수 있지만, 이 일대가 소현세자가 오갔던 공간인 것은 분명합니다. 대남문에서 북쪽으로 100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거리가 그 동선 안에 들어옵니다."
장리메이 선생이 현지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일대를 아직도 '까오료관(高麗館)' 부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그 지명은 역사를 보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년의 무게
소현세자의 선양 생활은 단순한 유폐가 아니었다. <심양일기>와 <심양장계>의 기록을 보면, 세자는 매월 5일, 15일, 25일마다 황궐에 입궐하여 각종 연회와 의례에 참석해야 했다. 청이 대명(對明)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대정전 앞마당에 전리품을 펼쳐 놓고 구경 시키는 자리에도 반드시 나가야 했다. 무력을 과시하며 조선을 압박하는 무언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이 굴욕의 상황 속에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었다. 외교 면에서 그는 청의 황족 및 장수들과 인맥을 구축하며 조선에 대한 청의 무리한 요구를 완화하려 애썼다. 실권자 도르곤과의 관계를 통해 양국 간 현안을 조율했고, 조선 정부의 입장을 대리하는 사실상의 외교관이었다.경제 측면에서도 탁월했다. 세자빈 강씨와 함께 심양관의 살림을 꾸려 나가며, 농사를 짓고, 부족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무역까지 관여했다. 300명이 넘는 인원에게 필요한 식량과 부식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이곳은 인질의 거처가 아니라 하나의 자립 경제 공동체였다.
문화적 안목도 남달랐다. 1644년 북경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무는 동안 서양인이 운영하는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에 관심을 가졌고, 독일인 신부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과 교류하며 천주교, 천문학, 수학, 서양 과학기술을 접했다. 귀국할 때 화포와 천리경(망원경), 천주교 서적, 여지구(지구본)까지 가져왔다. 포로의 신분으로도 세계를 향해 눈을 열어 둔 것이다. 조선의 어떤 왕도 하지 못한 일을 인질 신분의 세자가 해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노력이 본국에서는 독이 되었다. 아버지 인조는 아들의 능력을 두려워했다. 소현세자가 청의 황족과 친교를 맺고 서양 문물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인조는 아들이 자기를 대신하여 왕위를 노리는 것으로 의심했다. 인조의 총비 조소용은 세자빈 강씨를 모함하며 부자 사이를 더욱 갈라 놓았다.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까지 보내 세자의 동정을 주시했다.
돌이켜 보면, 인조는 조선 오백 년 역사에서 무능한 왕 중 하나였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명분은 화려했으나, 실제로는 이괄의 난으로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고,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두 번이나 오랑캐에게 치욕을 당했다. 삼전도의 치욕은 인조의 무능이 빚어낸 필연이었다. 그 치욕의 대가를 아들에게 떠넘겨 놓고, 그 아들이 치욕 속에서 일어서려 하자 오히려 아들을 버렸다. 아니, 버린 정도가 아니었다.
1645년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인조실록> 1645년 6월 27일 기록에 따르면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고 되어 있다. 380년이 지난 지금도 죽음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청나라에서 최고의 덕과 경영자로서의 비범한 재주까지 보여주었던 세자빈 강씨는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누명을 쓰고 사사(賜死)되었고, 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도로 유배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가장 탁월했던 세자의 가족이 가장 무능했던 아버지에 의해 몰살 당한 것이다.
'만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역사
적산가옥 앞에 서서, 나는 역사의 '만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소현세자가 무사히 왕위에 올랐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청나라의 실체를 직접 목격한 유일한 조선 왕족이었다. 명나라가 기울고 청나라가 일어서는 동아시아의 대전환기를 8년간 그 한복판에서 몸으로 겪었다. 반청(反清)의 명분에 집착하며 현실을 외면한 인조와 달리 소현세자는 변화하는 세계 질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조선의 살 길을 모색한 실용주의자였다.
아담 샬을 통해 접한 서양 과학기술은 조선에 200년 빠른 개화의 씨앗이 될 수 있었다. 화포와 천리경, 역법과 지구본 등 그가 가져온 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이었다. 만일 그가 왕이 되어 이 세계관을 정책으로 펼쳤다면, 조선은 일본보다 먼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19세기 말의 치욕적인 개항을 스스로의 힘으로 끌어냈을지도 모른다.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청과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운영하면서도 양국 간의 균형을 잡을 줄 아는 감각이 있었다. 인조 이후 조선이 300년간 빠져든 사대의 관성과 쇄국의 함정을 소현세자였다면 피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만일'은 없다. 성군의 기질을 보여주었던 세자는 청나라 군대가 아니라 그의 친아버지에 의해 쓰러졌다. 조선은 소현세자를 잃은 대가를 이후 300년에 걸쳐 치르게 된다. 이것이 역사의 비극이다.
적산가옥 앞에 서있자니 과거 두 역사가 포개어져 있다는 안타까움이 지워지지 않아 무척 마음 아팠다. 밑에는 17세기 병자호란 후 끌려온 소현세자와 60만 조선인 포로들의 눈물이 있다. 그 위에는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점령하고 지은 적산가옥이 덮여 있다. 그리고 지금 관리 없이 방치된 을씨년스러운 건물이 두 제국의 상흔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원래 1445년 신숙주와 성삼문의 발자취를 좇아 이곳에 왔다. 그러나 선양이라는 도시는 그보다 더 넓고 깊은 역사를 품고 있었다. 신숙주가 학문의 열정으로 이 땅을 밟은 것이 1445년이라면, 소현세자가 굴욕의 인질로 이 땅을 밟은 것은 1637년이다. 같은 요동의 땅이지만, 하나는 지식의 교류였고 하나는 전쟁의 상흔이었다. 장리메이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이곳에서 조선 왕세자가 8년을 보냈다니, 중국인인 저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역사는 어느 한쪽만의 것이 아니네요." 그 말이 가슴에 남았다.
기억해야 할 역사
안타까운 것은 이 장소에 아무런 안내판도, 기념 표지도 없다는 사실이다. 을씨년스럽게 낡은 적산가옥은 이 관리 부재를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지명만은 살아 있다. '까오료관', 즉 고려관. 그 이름 속에 390년 전의 기억이 아직 숨 쉬고 있다.
적산가옥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낡은 건물은 여전히 을씨년스러웠다. 소현세자가 이 언저리에서 8년을 버티며 한양의 하늘을 그리워했을 그 마음이, 390년의 세월을 건너 가슴에 와 닿았다.
선양에서 소현세자를 그리며
- 고려관 터에 서서
삼전도의 얼음 위에 무릎 꿇은 아버지 대신선양의 바람 속으로 걸어간 스물다섯의 세자여
님은 포로의 이름으로 왔으나외교관의 눈으로 세상을 읽었고경영자의 손으로 삼백 식구를 먹였으며학자의 가슴으로 서쪽 하늘의 별을 품었다
아담 샬의 천리경 너머로님이 본 것은 무엇이었나조선의 하늘이 얼마나 좁은지를아버지의 눈이 얼마나 닫혀 있는지를이미 알고 있었을 그대
여덟 해를 버티고 돌아간 고국에서두 달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온몸이 검어지고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하니님을 죽인 것은 독인가, 아버지인가, 시대인가
만일 님께서 임금이 되었더라면천리경은 궁궐에 걸렸을 것이고지구본은 경복궁 마당에 놓였을 것이며조선은 스스로 문을 열었을 것이다이백 년 뒤의 치욕을 이백 년 앞서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만일'을 허락하지 않았고가장 열린 눈은 가장 닫힌 손에 감겼다
삼백구십 년 뒤, 나는 님께서 걸었던 이 거리에 서서을씨년스러운 적산가옥 앞에서님의 이름을 부른다
소현, 소현세자까오료관의 바람이 아직도 그대를 기억한다
2026년 3월, 선양 고려관 터에서, 김슬옹
지난 4일, 중국 선양(심양, 瀋陽)에 왔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결정적 고리를 찾아, 580년 전 신숙주·성삼문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가는 요동 답사의 첫날이었다.
나는 뜻밖의 역사와 마주쳤다. 1445년 신숙주 일행이 이 도시를 지나갔을 때보다 약 200년 뒤, 또 다른 조선인이 이곳에 끌려와 8년(1637~1645)을 보내야 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병자호란(1636~1637)의 치욕이 낳은, 그러나 치욕 속에서 더욱 빛났던 비운의 왕세자다.
답사단의 중국 전문가 권오향 박사(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겸임교수) 릴게임사이트 가 일정을 짜며 소현세자의 거처였던 심양관(고려관) 터 일대 방문을 넣은 까닭이 있었다. 장리메이 선생의 통역과 현지 안내로 우리 셋은 선양 옛 성곽의 조양로(朝陽路) 동편 일대를 걸었다.
삼전도의 굴욕에서 심양관까지
바다이야기예시
▲ 조선 시대 소현세자 일행이 머물렀을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선양 고려관 터 일대에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적산가옥. 관리가 되지 않아 을씨년스럽게 낡아 있다.
릴게임바다신2
ⓒ 김슬옹
1637년 1월, 인조가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이른바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항복 의례를 올렸다. 조선 오백 년 역사에서 이보다 치욕 야마토게임하기 적인 순간이 있었을까?
그 치욕의 대가로 소현세자(1612~1645)는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뒷날의 효종) 부부와 함께 볼모가 되어 선양으로 끌려왔다. 1637년 4월 10일 선양에 도착한 세자 일행은 처음 동관(東館)에 머물다가, 5월 7일 청 태종이 새로 지어 준 심양관으로 옮겨갔다. 청나라에서는 이 건물을 '고려 바다이야기디시 관(高麗館)'이라 불렀다.
심양관은 대남문 북쪽 약 120미터 지점, 현재의 조양로 동편에 있었다. 세자와 대군의 가족, 세자시강원과 관원, 환관, 궁녀, 역관, 군관, 의원까지 합하면 무려 300여 명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인질의 규모가 상상 외로 컸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인질이면서 동시에 조선과 청 사이의 연락과 외교를 담당하는 사실상의 해외 상주 공관장 구실을 했다.
심양관의 원래 건물은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1907년 <심양지도>와 1924년 <최신심양지도>에 '고려관호동(高麗館胡同)'이라는 골목 이름이 정확히 남아 있었지만, 그 자리에는 이미 다른 건물들이 들어섰다.
우리가 찾아간 곳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지은 적산가옥이 남아 있었다. 만주 사변(1931) 이후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고 봉천(지금 심양에 편입)을 주요 거점으로 삼으면서, 이 일대에 일본식 건물들을 대거 지었던 것이다. 소현세자가 8년을 보낸 조선관 터 위에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이 덮어 씌워진 셈이다.
건물을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관리가 안 되어 많이 낡아 있었다. 1층 일부는 상가로 쓰이고 있었지만, 외부 벽은 갈라지고 건물 안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3월 초 선양의 찬바람이 건물 사이를 훑고 지나갈 때, 이 황량함이 오히려 소현세자의 8년간의 포로 생활을 말없이 보여 주는 듯했다. 권오향 박사가 말했다.
"여기가 정확히 고려관 자리는 아닐 수 있지만, 이 일대가 소현세자가 오갔던 공간인 것은 분명합니다. 대남문에서 북쪽으로 100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거리가 그 동선 안에 들어옵니다."
장리메이 선생이 현지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일대를 아직도 '까오료관(高麗館)' 부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그 지명은 역사를 보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년의 무게
소현세자의 선양 생활은 단순한 유폐가 아니었다. <심양일기>와 <심양장계>의 기록을 보면, 세자는 매월 5일, 15일, 25일마다 황궐에 입궐하여 각종 연회와 의례에 참석해야 했다. 청이 대명(對明)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대정전 앞마당에 전리품을 펼쳐 놓고 구경 시키는 자리에도 반드시 나가야 했다. 무력을 과시하며 조선을 압박하는 무언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이 굴욕의 상황 속에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었다. 외교 면에서 그는 청의 황족 및 장수들과 인맥을 구축하며 조선에 대한 청의 무리한 요구를 완화하려 애썼다. 실권자 도르곤과의 관계를 통해 양국 간 현안을 조율했고, 조선 정부의 입장을 대리하는 사실상의 외교관이었다.경제 측면에서도 탁월했다. 세자빈 강씨와 함께 심양관의 살림을 꾸려 나가며, 농사를 짓고, 부족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무역까지 관여했다. 300명이 넘는 인원에게 필요한 식량과 부식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이곳은 인질의 거처가 아니라 하나의 자립 경제 공동체였다.
문화적 안목도 남달랐다. 1644년 북경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무는 동안 서양인이 운영하는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에 관심을 가졌고, 독일인 신부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과 교류하며 천주교, 천문학, 수학, 서양 과학기술을 접했다. 귀국할 때 화포와 천리경(망원경), 천주교 서적, 여지구(지구본)까지 가져왔다. 포로의 신분으로도 세계를 향해 눈을 열어 둔 것이다. 조선의 어떤 왕도 하지 못한 일을 인질 신분의 세자가 해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노력이 본국에서는 독이 되었다. 아버지 인조는 아들의 능력을 두려워했다. 소현세자가 청의 황족과 친교를 맺고 서양 문물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인조는 아들이 자기를 대신하여 왕위를 노리는 것으로 의심했다. 인조의 총비 조소용은 세자빈 강씨를 모함하며 부자 사이를 더욱 갈라 놓았다.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까지 보내 세자의 동정을 주시했다.
돌이켜 보면, 인조는 조선 오백 년 역사에서 무능한 왕 중 하나였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명분은 화려했으나, 실제로는 이괄의 난으로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고,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두 번이나 오랑캐에게 치욕을 당했다. 삼전도의 치욕은 인조의 무능이 빚어낸 필연이었다. 그 치욕의 대가를 아들에게 떠넘겨 놓고, 그 아들이 치욕 속에서 일어서려 하자 오히려 아들을 버렸다. 아니, 버린 정도가 아니었다.
1645년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인조실록> 1645년 6월 27일 기록에 따르면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고 되어 있다. 380년이 지난 지금도 죽음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청나라에서 최고의 덕과 경영자로서의 비범한 재주까지 보여주었던 세자빈 강씨는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누명을 쓰고 사사(賜死)되었고, 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도로 유배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가장 탁월했던 세자의 가족이 가장 무능했던 아버지에 의해 몰살 당한 것이다.
'만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역사
적산가옥 앞에 서서, 나는 역사의 '만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소현세자가 무사히 왕위에 올랐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청나라의 실체를 직접 목격한 유일한 조선 왕족이었다. 명나라가 기울고 청나라가 일어서는 동아시아의 대전환기를 8년간 그 한복판에서 몸으로 겪었다. 반청(反清)의 명분에 집착하며 현실을 외면한 인조와 달리 소현세자는 변화하는 세계 질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조선의 살 길을 모색한 실용주의자였다.
아담 샬을 통해 접한 서양 과학기술은 조선에 200년 빠른 개화의 씨앗이 될 수 있었다. 화포와 천리경, 역법과 지구본 등 그가 가져온 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이었다. 만일 그가 왕이 되어 이 세계관을 정책으로 펼쳤다면, 조선은 일본보다 먼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19세기 말의 치욕적인 개항을 스스로의 힘으로 끌어냈을지도 모른다.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청과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운영하면서도 양국 간의 균형을 잡을 줄 아는 감각이 있었다. 인조 이후 조선이 300년간 빠져든 사대의 관성과 쇄국의 함정을 소현세자였다면 피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만일'은 없다. 성군의 기질을 보여주었던 세자는 청나라 군대가 아니라 그의 친아버지에 의해 쓰러졌다. 조선은 소현세자를 잃은 대가를 이후 300년에 걸쳐 치르게 된다. 이것이 역사의 비극이다.
적산가옥 앞에 서있자니 과거 두 역사가 포개어져 있다는 안타까움이 지워지지 않아 무척 마음 아팠다. 밑에는 17세기 병자호란 후 끌려온 소현세자와 60만 조선인 포로들의 눈물이 있다. 그 위에는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점령하고 지은 적산가옥이 덮여 있다. 그리고 지금 관리 없이 방치된 을씨년스러운 건물이 두 제국의 상흔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원래 1445년 신숙주와 성삼문의 발자취를 좇아 이곳에 왔다. 그러나 선양이라는 도시는 그보다 더 넓고 깊은 역사를 품고 있었다. 신숙주가 학문의 열정으로 이 땅을 밟은 것이 1445년이라면, 소현세자가 굴욕의 인질로 이 땅을 밟은 것은 1637년이다. 같은 요동의 땅이지만, 하나는 지식의 교류였고 하나는 전쟁의 상흔이었다. 장리메이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이곳에서 조선 왕세자가 8년을 보냈다니, 중국인인 저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역사는 어느 한쪽만의 것이 아니네요." 그 말이 가슴에 남았다.
기억해야 할 역사
안타까운 것은 이 장소에 아무런 안내판도, 기념 표지도 없다는 사실이다. 을씨년스럽게 낡은 적산가옥은 이 관리 부재를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지명만은 살아 있다. '까오료관', 즉 고려관. 그 이름 속에 390년 전의 기억이 아직 숨 쉬고 있다.
적산가옥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낡은 건물은 여전히 을씨년스러웠다. 소현세자가 이 언저리에서 8년을 버티며 한양의 하늘을 그리워했을 그 마음이, 390년의 세월을 건너 가슴에 와 닿았다.
선양에서 소현세자를 그리며
- 고려관 터에 서서
삼전도의 얼음 위에 무릎 꿇은 아버지 대신선양의 바람 속으로 걸어간 스물다섯의 세자여
님은 포로의 이름으로 왔으나외교관의 눈으로 세상을 읽었고경영자의 손으로 삼백 식구를 먹였으며학자의 가슴으로 서쪽 하늘의 별을 품었다
아담 샬의 천리경 너머로님이 본 것은 무엇이었나조선의 하늘이 얼마나 좁은지를아버지의 눈이 얼마나 닫혀 있는지를이미 알고 있었을 그대
여덟 해를 버티고 돌아간 고국에서두 달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온몸이 검어지고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하니님을 죽인 것은 독인가, 아버지인가, 시대인가
만일 님께서 임금이 되었더라면천리경은 궁궐에 걸렸을 것이고지구본은 경복궁 마당에 놓였을 것이며조선은 스스로 문을 열었을 것이다이백 년 뒤의 치욕을 이백 년 앞서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만일'을 허락하지 않았고가장 열린 눈은 가장 닫힌 손에 감겼다
삼백구십 년 뒤, 나는 님께서 걸었던 이 거리에 서서을씨년스러운 적산가옥 앞에서님의 이름을 부른다
소현, 소현세자까오료관의 바람이 아직도 그대를 기억한다
2026년 3월, 선양 고려관 터에서, 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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