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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추격자에서 빠른 전환자의 시대를 선언하는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 오렌지플래닛 창업재단 이사장.
코스피 5000을 웃돌면서 세상은 온통 주식 이야기다. 벼락부자와 벼락 거지의 경계에 서서, 세상의 희비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에게만 허용된 것 같다. ‘삼성전자 주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미리 사둔 티켓으로 제때 온 기차를 타고 즐기는 사람과 차표도 없이 빈 장바구니를 들고 배회하는 사람. 위로부터의 시그널에 맞춰 젊은 개미들은 빚내서 집 대신 주식을 사고, 노인들은 현금 다발을 들고 증권사 창구에서 발을 구른다.
게임몰 반도체 주가가 폭등하는 시기에 반도체 신화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을 만났다. 그가 ‘다시, 초격차’라는 책을 낸 지 한 달 만이었다. 반도체 사이클이 슈퍼 모멘텀을 맞았지만, 앞날은 더욱 안개 같은 상황에서 권오현이라는 이름은 소환 가치가 꽤 높았다. 1985년 이병철 회장 시절, 미국 삼성반도체 연구소로 입사해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만들었고, 릴게임방법 2017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승진해 사상 최대의 실적을 끌어낸 설화적 인물.
권오현은 현재 오렌지 플래닛의 창업재단 이사장으로 스타트업 지원과 멘토링을 하고 있다.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가 오너 사이클에서 유일한 전문 경영인으로 ‘초격차 전략’의 토대를 닦은 그에게 반도체의 미래와 리더의 클래스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를 황금성슬롯 듣고자 대화를 청했다.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교착 상태가 깊어지는 가운데, 강남 테헤란로의 초고층 빌딩 회의실로 권오현이 들어섰다. 분홍색 티셔츠에 스키니한 바지를 입은 이 젠틀한 신사는 살면서 한 번도 인터뷰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인터뷰를 왜 안 하셨어요?
“할 이유를 못 느꼈어요. 할 백경릴게임 말은 실적으로 다 하고 있었고. 만나면 개인적인 얘기를 물을 텐데, 그건 내 프라이버시니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깜짝 놀랐다. 초집중하지 않으면 맥락을 놓칠 것 같아 눈썹을 치켜뜨고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 청취 그 자체에 신경을 쓰느라 기진한 나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느긋하고 주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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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시 초격차’를 통해 질문한다. 왜 어떤 기업은 성장하고 어떤 기업은 쇠퇴하는가?
-‘다시 초격차’를 들고 나오셨어요. 8년 만입니다.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처음 ‘초격차’ 쓰고 ‘리더의 질문’까지 후속편으로 써냈어요. 그걸로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웃음). 현직에서 물러나서 보니 나라도 어렵고 삼성전자도 어려워요. 그 모습을 보고 궁금했어요. ‘왜 어떤 기업은 나빠지고 어떤 기업은 살아남는지’. 한동안 그 답을 찾느라 몰두했고 이 책이 그 결과예요.”
더 이상의 ‘초격차’ 간행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처음 ‘초격차’라는 말을 듣고 신선하게 압도됐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이제 그 말은 재계의 보통명사가 됐어요.
“주변에서 상표등록 하라고도 해요(웃음). 초격차는 삼성 내부 회의에서 자주 쓰던 말이었어요. 격차를 벌리는 정도로는 안 된다, 그냥 갭이 있는 정도로는 안 된다. ‘클래스가 다르다.’ ‘레벨이 다르다.’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 내자는 전략이었어요.”
-그 결과가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압도적 선방을 만들어 냈겠지요. 반도체 분야에서 슈퍼 모멘텀이 왔고 주식 시장의 개인 투자자들은 흥분 상태입니다. 이 사이클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가 모든 사람의 관심사예요.
“반도체는 앞으로 10년간은 성장할 거예요. 이번에 좀 비정상적으로 많이 오르긴 했지만. 여하튼 호황기예요. 조정이 와도 예전처럼 크게 널뛰기하진 않을 겁니다. 왜냐? 과거엔 플레이어가 많았고 누가 투자를 할지 몰랐지만, 지금은 시장에 남은 플레이어가 많지 않아요. 워낙 R&D에 돈이 많이 들고 대규모 투자가 있어야 가능한 업종이라 뛰어들기 쉽지 않아요.”
중국이 큰 변수지만, 현재로선 유럽도 일본도 대등한 플레이어가 되기 어렵다고 했다. 실리콘밸리가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반도체는 대체 불가능한 품목이라고.
▲메모리 반도체는 특정 기능을 더 빠르게 더 작게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그 기술적 특성이 우리 사회의 장점과 잘 맞아떨어졌다.
-메모리를 양궁에 비메모리를 클레이 사격에 비유한 대목이 절묘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양궁을 잘하지요? 메모리 반도체는 명확한 과녁에 쏘는 양궁 같은 기술이에요. 정밀한 미세 공정으로 불량률을 최소화해서 계속 10점을 쏘는 식이죠.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메모리는 읽고 쓰는 기능이 기본이에요. 목표가 뚜렷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잘 모르고 “우리도 CPU, 비메모리를 키워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지만, 쉽지 않아요. 우리가 10년 전, 20년 전에 AI 칩이나 스마트폰 칩(AP)이 필요할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제가 1997년에 처음 비메모리 사업부 책임을 맡았을 때 총매출액이 10억 불 정도였어요. 내려올 때 150억 불쯤 됐어요. 그 정도 성장도 자그마치 10년이 걸렸어요. 그만큼 어려워요. 명문대 수석하고 싶은 건 모든 이들의 희망 사항이죠. 그런데 비메모리 잘 되는 나라를 보세요. 절대 강자는 (엔비디아, 애플이 있는) 미국이에요.
비메모리는 움직이는 과녁을 상대로 해요. 미국만 유일하게 시스템을 계속 정의하면서 가고 있어요. 지난 20년간 미국은 움직이는 과녁을 쏘는 클레이 사격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업은 일본도 유럽도 어려워요.”
-파운드리(위탁 생산)의 위상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요?
“2005년에 내가 파운드리 팀을 만들었을 때, 우리 기술은 대만의 TSMC보다 3세대 정도 뒤처져 있었어요. 지금은 기술 자체로는 비슷해요. 계속 잘해 나간다는 가정하에, TSMC와 삼성은 같이 가야 합니다. 갑자기 ‘내후년에 우리가 TSMC를 이기겠다’ 무리하게 열을 낼 필요 없어요. “너도 좀 먹고 나도 좀 먹을게.” 이 정도의 레이스가 좋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결국 ‘소품종 초 대량생산’을 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했다. 성실함으로 정밀함을 높여온 ‘궁수의 나라’는 HBM으로 지금 추격자의 열매를 따 먹고 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다른 정체성의 인재가 필요하다고 쓴소리를 더 했다.
▲TSMC 대만 파운드리 라인(팹16) 외부 모습. /TSMC
-한 나라가 인재를 어떻게 쓰고 있는가에 따라 그 나라의 비전과 방향이 달라집니다. 중국의 인재는 공대로, 미국은 법대로, 한국은 의대로 가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세계의 탤런트를 다 쓸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에요. 미국 본토의 엘리트는 법대로 간다지만, 외국의 천재들은 다 미국에서 창업하려고 몰려가죠. 실리콘밸리는 2/3가 이민자고 최고 부자들도 다 이민자예요. 일론 머스크도 젠슨 황도 다 이민자잖아. 중국도 별종이지만, 어쨌든 미국은 ‘안되는 것 빼고 다 하라’는 포용적인 시스템이 떠받치고 있어요.”
한국, 일본, 유럽은 지금 다 같이 헤매고 있다고 했다. “유럽도 노벨상만 받았지, 20년이 넘도록 새로운 인더스트리를 못 만들었어요. ‘어떤 인재를 키워야 할까?’ 그건 제도가 말해줘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유치원 의대반부터 늦은 밤까지 ‘틀리지 않는 기술’만 배우잖아요. 그걸로 어떻게 AI를 이기겠어요?”
시급한 건 입시제도를 고치는 건데, 권력을 가진 기득권이 그 역할을 안 하고 있다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녀분은 어떻게 양육하셨습니까?
“우리 딸은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한 적이 없어요. 본인도 싫다고 했는데 그래서 명문대는 못 갔어요(웃음). “아빠가 그렇게 교육해서 불행하냐?” 물었더니 행복하대요. 그럼 된 거예요. 꼭 명문대 나와야 행복한 건 아니니까. 그랬더니 딸이 자기 아이들도 학원을 안 보내요. 그게 맞는 것 같다고. 하지만 자기도 불안하지, 하하. 내가 걱정말라고 했어요.
10년 지나면 인구가 줄어서 인서울 대학에 전국 학생들 다 채우고도 남을 거라고. 지방대는 학생을 모시러 다니겠지요. 아니, 대학이라는 게 사실 큰 의미가 없어요. 농담으로 내가 건강 잘 지켜서 손주들 창업이라도 도와주겠다고요. 진심은 그거예요. 사회적 비용만 늘어나고 ROI 안 나오는 이 입시 교육, ‘안 틀리는 기술’ 좀 그만 가르치라고요.”
▲CES2025 삼성전자 전시관 입구
-하지만 삼성이야말로 ‘안 틀리는 기술’을 잘 익힌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요. 모범생들만 모이는 곳 아닙니까?
“그런데 모범생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시키는 일은 잘하지만, 스스로 하는 일은 잘 못해요. 삼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렇습니다. 패스트 팔로워 방식으로 트레이닝 받은 사람은 실수나 낭비가 거의 없어요. 그렇게 낭비 요소를 줄이는 전략으로 한국이 선진국 문턱까지 올 수 있었죠. 하지만 세상이 바뀌니 다들 헤매고 주춤거려요. 한국인이 갑자기 머리가 나빠져서? MZ가 게을러서? 아닙니다.”
권오현의 지적대로 우리 사는 시대는 이미 빠른 추격자에서 빠른 전환자의 시대로 돌아섰다. 바야흐로 부지런한 지능과 거대한 지능의 협연이 필요한 시점. 부지런한 지능은 시간을 단축하고, 거대한 지능은 무수한 데이터 속 패턴을 찾아서 우리가 모르던 깨달음을 전해준다.
땅을 접어서 달리는 축지법을 쓰는 사람들,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지만 예측하고 ‘적정화’하는 클레이 사격형 인재가 절실한 타이밍이다.
-어떤 제도가 최적의 타이밍을 끌어낼 수 있을까요?
“옛날 카피 시대에는 ‘소니를 이기자’ ‘인텔을 이기자’ 같은 분명한 타겟이 있었어요. 지금은 어떤 기술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요. 그래서 무조건 선점이 중요합니다. 선점하려면 제도가 행위를 막아서면 안 돼요. 중국도 실리콘밸리도 열정적으로 연구해요. 잠도 안 자고 그 일만 합니다.
반면 우리는? 근무 시간을 법으로 52시간 규제해 놓으면 못 당해요. 52시간 제도는 블루칼라에는 맞아요. IP, 콘텐츠, 반도체 산업은 달라요. 유연하게 가야죠. 1년 세게 일하고 한 달 휴가 줘도 됩니다.”
▲경기 이천 SK하이닉스 반도체 팹 전경.
새로운 시대가 오면 업의 속도에 맞춰 제도를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AI는 어느 정도 쓰세요?
“저는 실무를 하는 편이 아니라 간단한 것들만 써요. 내가 말하는 건 AI 시대에 맞는 제도예요. 우리 제도가 미국만큼 좋진 않아도, 일본이나 유럽보다는 잘 만들어낼 수 있어요. 제도는 상대적인 거라 조금만 고쳐도 성과가 나요. 그러면 1등은 못해도 2등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골프에서 남들이 ‘더블 보기’ 칠 때, 나는 ‘보기’만 쳐도 되거든요. 너무 이상적인 걸 쫓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질문을 해도 기승전 ‘제도’로 돌아왔다. 책에서 그는 제도를 ‘조직의 주춧돌’로 리더를 ‘조직의 기둥’으로 설명했다. 잘 나가던 기업이 갑자기 쇠퇴하거나 반대로 급성장하는 건 오직 ‘리더’ 때문이었다. 추락하던 마이크로소프트가 CEO 사티아 나델라의 통찰력으로 부활하고, 잘 나가던 인텔이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리더의 부재로 서서히 추락했던 것처럼.
그러나 단기 생존을 넘어 ‘지속 성장’과 더 나은 기회를 찾는 힘은 근본적으로 제도에 있다고 했다. 미국이 남북전쟁과 인종 갈등, 대공황 등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권오현은 ‘제도의 힘’으로 보고 있다. 스타트업처럼 출발한 나라이기에, 정치적으로는 ‘리더의 변동성’을 방어할 최후의 제도를 만들었고, 경제적으로는 ‘안 되는 것 빼고는 다하라’는 유연한 기준으로 산업을 일으켰다는 것.
-하지만 현재 미국은 트럼프 리스크로 전 세계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빅테크 유니콘은 잘 나가지만 기업의 금융화 현상은 심각하며, 40년 동안 사회 인프라와 제조업은 붕괴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런 어려움을 이용해서 트럼프가 갈라치기 해서 대통령이 됐어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도가 좋으니 대법관이 막아서고, 트럼프는 2년 뒤면 교체됩니다. 미국의 시스템이 다 좋다는 건 아니지만 기업 입장, 경영자 입장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가장 나아요.
지난 10년을 봐도, 최근 3년을 봐도 미국만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10년 전 EU의 GDP 총합이 미국하고 같았는데, 지금은 미국이 두 배쯤 될 거예요. 유럽은 새로운 인더스트리를 못 만드는데 미국은 만들고 있잖아요. 250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한 유일한 국가가 미국이에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최강대국이 됐고, 트럼프 리스크가 심해도 앞으로 30~40년간 미국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아요. 그 기초가 바로 ‘네거티브 시스템’ 즉 ‘안되는 것 빼고 다 하라’는 허용적인 시스템입니다.”
미국이 중국 기술 성장을 견제하면서 ‘벌어준 시간’을 한국이 잘 활용하지 않는다면, 추월당하는 건 순식간이라고 했다.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굴기를 이끌고 있는 기업 중 하나로 알려진 루이리(Lui-li) IC는 연내 D램 생산장비를 투입해 내년부터 본격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리더 이야기를 해보지요.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이병철, 정주영을 노이즈 속에서 시그널을 읽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촉은 어떻게 생깁니까?
“골방에서 면벽하면 도사는 되겠지만, 촉이 좋은 리더는 못됩니다. 촉은 다양한 사람 만나고 세상의 흐름 속에 있어야 생겨요. 흐름을 알려면 내 비즈니스 밖의 사람,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을 자주 만나냐 해요.”
골프 선수가 맨날 골프 얘기만 하면 골프 말고 뭘 알겠느냐고 했다. 카피 시대는 이제 지났으니 역사 전공하다가 생물학으로 튀는 서양인들처럼 사방으로 열려 있으라고 부추겼다. CEO의 통찰력은 ‘누굴 만나는지’ 보면 다 가늠이 되더라고. 그 자신, 사장된 이후로 주말에 출근을 안 했다고 했다.
“주말이면 예술가 만나고 PD들 만나러 다녔어요. 기자하고 정치가만 빼고는 다 만나고 다녔어요.”
-놀랍습니다. 삼성을 포함해서 주요 그룹 임원 중에 주말에 출근을 안 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요.
“나는 제너럴한 쪽은 아니었어요(웃음). 좀 이상하게 행동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어떻게 안 쫓겨났느냐? 나는 적자 사업부를 많이 맡았어요. 그렇게 발령을 많이 받았어요. R&D하다가 메모리 하다가 적자 사업부를 맡은 거예요.
다행히 나는 겁이 좀 없었어요. ‘쫓겨나도 굶어 죽긴 하겠어.’ 이런 베짱이랄까. 무엇보다 호기심이 시키는 데로 일을 했더니, 턴어라운드가 됐어요.‘ 주말도 안 나오고 칼퇴근하고, 저 사람 맨날 노는 거 아니야?’ 주변에서 의심해도, 일단 일이 잘되니 용납이 됐어요. 전교 1등 하면 아무도 안 건드리잖아요(웃음).
그런데 그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직원들을 잘 키워서예요. 기독교도 예수님이 뛴 게 아니라 제자들이 뛰어서 지금까지 왔잖아요.”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주역인 삼성전자 개발팀의 모습. 사진 가운데가 당시 개발팀장이었던 권오현.
-하지만 위임만큼 어려운 것도 없지요.
“나는 아랫사람 볶아치러 회사 오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냉장고 정리하고 유통기한 검사하고 싶으면, 집에 가서 해라. 회사 오면 직급에 걸맞은 일을 해야지.” 불안하다고 자기가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면 아랫사람이 크질 못해요. 카피 시대엔 틀리는 게 죄악이니까 상사한테 깨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안 됩니다. 실패하더라도 시켜야죠.
실수하더라도 그 부하직원이 실력이 늘잖아요. 패스트 무버 시대에는 부하직원과 경쟁하면 안 돼요. 경쟁사와 경쟁하고 미래와 경쟁해야죠.”
-경영자 시절 본인이 내린 가장 의미 있는 결정과 의미 있는 실패는 무엇이었습니까?
“미래에 투자한 일은 다 성공했어요. 3D NAND(반도체를 옆이 아닌 수직으로 쌓아 올려 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린 기술)도 삼성이 독점하다 다른 기업들이 쫓아왔어요. 그때 또 한 번 다음 단계로 판을 바꿨어요. 진짜 1등이 되려면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합니다. 내가 더 잘하는 걸 하면 돈은 벌겠지만, 피곤하게 살아야 해요(웃음).
삼성 디스플레이 시절에 대형 LCD 사업을 축소하고 모바일 OLED로 전환한 것도 기억나요. 흑자 사업이었지만, 쇠퇴하는 사업으로 판단되면 접어요. ‘이익이 나고 있다’고 해도 호통을 쳐요.
“당신 아들이 여기서 일하게 할 거냐?”고. 내리막길을 걷는 사업은 접고 성장 산업으로 돌려야 해요. 미래가 중요해요.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 지금 반도체, 방산, 조선 말고는 업황이 좋은 게 없잖아요.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계속 업을 정의해나가야 해요. 실패를 자산 삼아서.”
▲반도체 슈퍼 모멘텀에 취한 우리에게 다음 스텝을 이야기하는 권오현의 ‘다시 초격차’
-삼성도 HBM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실패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2024년 10월, 3분기 잠정 실적 발표 직후에 반성문까지 쓸 정도로 뼈아픈 실패를 선언했었지요.
“HBM은 내가 대표하던 시절에 만들었어요. 전영현 사장이 그때 사업부장이었는데 HBM2를 만들어서 엔비디아에 100%를 납품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이익률이 떨어지니까 재무적 판단을 해버렸어요.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거죠. 쉽게 말해 자식이 시험 성적 좀 떨어졌다고 아예 공부를 안 시킨 거예요.
결국 HBM은 SK하이닉스에 가서 대박이 났어요. 당장 돈이 안 된다고 버리면 이렇게 뼈아픈 결과를 맞아요. 삼성뿐 아니라 한국의 기업들을 보면 지금 잠재 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이 사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나온 궤적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지점은 없는지요? 스스로 운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까?
“돌아보면 나는 모범생은 아니었어요. 내가 했던 경영도 삼성의 대표적 경영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나는 어쩌면 이상한 경영을 한 거예요. 열심히 한 사람도 아니었어요. 브레인은 열심히 돌렸지만, 피지컬리 열심히 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다만 학창 시절부터 ‘틀리면 어떡하지?’ 보다는 ‘틀려도 한번 해볼게’ 쪽이었어요. ‘이렇게 하면 더 낫지 않을까요?’ 선생님께 얘기라도 해보는 아이였죠.
운을 이야기하자면, 50년생부터 65년생까지는 다 운 좋은 세대였어요. 고속 성장기를 살았으니 진짜 럭키한 거죠. 그중에서도 나는 더 운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75년도에 대학을 졸업하고 카이스트 석사로 반도체라는 학문을 처음 배운 거예요. 한국엔 반도체 산업이라는 게 아예 없을 때였어요.
실리콘밸리에 있는 스탠퍼드대학으로 유학을 간 것도 절묘했어요. 이병철 회장이 1983년에 반도체를 시작하면서, 한국에 반도체를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 졸업하자마자 저를 부르셨어요. 그게 다 천운이 아니면 뭐겠어요? 그런 타이밍이 아니었다면 내가 크게 쓰일 수 있었겠어요? 삼성이 그때 반도체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나는 미국에서 교수나 하며 늙어갔을 거예요.”
자신 같은 베이비부머는 수혜를 누린 세대지만, 나침반 없이 방황하는 청년들을 보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낯빛이 어두워졌다. 미래의 기대치가 없어 결혼도 출산도 중단한 다음 세대를 위해 답답해서 책을 썼노라고.
▲그는 초격차의 비밀은 인간 본성에 있다고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겐 어떤 리더가 필요합니까? 어떤 경영자에게 가장 많이 배우셨어요?
“미래를 생각하는 리더. 진짜 그거 하나예요. 이건희 회장은 한 번도 나한테 지시를 내린 적이 없어요. ‘매출 얼마야?’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리더가 매출만 질문하면 그 조직은 평생 발전을 못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앞으로 어떤 미래가 오는지? 뭘 준비해야 하는지? 인재는 어떻게 키울 건지?’ 같은 질문만 집요하게 던졌어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어서, 저는 또 나름의 로직을 치열하게 연구했어요.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어느 타겟을 맞춰야 하는지 정답은 없어요. 계속 시도하고 시스템을 정의하도록, 리더가 길을 열어줘야지요.
실무적으로 조언하자면 리더는 자신에게 온 공을 빨리 패스해야 합니다. 나는 문자도 메일도 보는 즉시 답을 줬어요. 공을 갖고 뭉개면 남는 건 번아웃입니다. 메시도 호날두도 전체 경기 중 공 소유 시간은 1분이 채 안 돼요. 오래 갖고 있으면 공격당하고 부상만 잦죠. 결정적일 때 해결사 역할을 하면 됩니다.”
권오현은 초격차의 비밀은 인간 본성에 있다고 했다. 탐험하고 한계에 도전하는 본성이 바로 초격차의 비밀이었다고. 그 자신, 적자 사업을 맡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결정을 내렸던 순간들이 모여 ‘결단력’이 자랐던 것처럼, 과감하게 위임하고 질문하라고. 결국 의미와 흥미, 재미와 보상이 있는 곳에 자석처럼 사람이 모인다는 말에 오래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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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5000을 웃돌면서 세상은 온통 주식 이야기다. 벼락부자와 벼락 거지의 경계에 서서, 세상의 희비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에게만 허용된 것 같다. ‘삼성전자 주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미리 사둔 티켓으로 제때 온 기차를 타고 즐기는 사람과 차표도 없이 빈 장바구니를 들고 배회하는 사람. 위로부터의 시그널에 맞춰 젊은 개미들은 빚내서 집 대신 주식을 사고, 노인들은 현금 다발을 들고 증권사 창구에서 발을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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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현은 현재 오렌지 플래닛의 창업재단 이사장으로 스타트업 지원과 멘토링을 하고 있다.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가 오너 사이클에서 유일한 전문 경영인으로 ‘초격차 전략’의 토대를 닦은 그에게 반도체의 미래와 리더의 클래스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를 황금성슬롯 듣고자 대화를 청했다.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교착 상태가 깊어지는 가운데, 강남 테헤란로의 초고층 빌딩 회의실로 권오현이 들어섰다. 분홍색 티셔츠에 스키니한 바지를 입은 이 젠틀한 신사는 살면서 한 번도 인터뷰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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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이유를 못 느꼈어요. 할 백경릴게임 말은 실적으로 다 하고 있었고. 만나면 개인적인 얘기를 물을 텐데, 그건 내 프라이버시니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깜짝 놀랐다. 초집중하지 않으면 맥락을 놓칠 것 같아 눈썹을 치켜뜨고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 청취 그 자체에 신경을 쓰느라 기진한 나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느긋하고 주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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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시 초격차’를 통해 질문한다. 왜 어떤 기업은 성장하고 어떤 기업은 쇠퇴하는가?
-‘다시 초격차’를 들고 나오셨어요. 8년 만입니다.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처음 ‘초격차’ 쓰고 ‘리더의 질문’까지 후속편으로 써냈어요. 그걸로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웃음). 현직에서 물러나서 보니 나라도 어렵고 삼성전자도 어려워요. 그 모습을 보고 궁금했어요. ‘왜 어떤 기업은 나빠지고 어떤 기업은 살아남는지’. 한동안 그 답을 찾느라 몰두했고 이 책이 그 결과예요.”
더 이상의 ‘초격차’ 간행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처음 ‘초격차’라는 말을 듣고 신선하게 압도됐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이제 그 말은 재계의 보통명사가 됐어요.
“주변에서 상표등록 하라고도 해요(웃음). 초격차는 삼성 내부 회의에서 자주 쓰던 말이었어요. 격차를 벌리는 정도로는 안 된다, 그냥 갭이 있는 정도로는 안 된다. ‘클래스가 다르다.’ ‘레벨이 다르다.’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 내자는 전략이었어요.”
-그 결과가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압도적 선방을 만들어 냈겠지요. 반도체 분야에서 슈퍼 모멘텀이 왔고 주식 시장의 개인 투자자들은 흥분 상태입니다. 이 사이클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가 모든 사람의 관심사예요.
“반도체는 앞으로 10년간은 성장할 거예요. 이번에 좀 비정상적으로 많이 오르긴 했지만. 여하튼 호황기예요. 조정이 와도 예전처럼 크게 널뛰기하진 않을 겁니다. 왜냐? 과거엔 플레이어가 많았고 누가 투자를 할지 몰랐지만, 지금은 시장에 남은 플레이어가 많지 않아요. 워낙 R&D에 돈이 많이 들고 대규모 투자가 있어야 가능한 업종이라 뛰어들기 쉽지 않아요.”
중국이 큰 변수지만, 현재로선 유럽도 일본도 대등한 플레이어가 되기 어렵다고 했다. 실리콘밸리가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반도체는 대체 불가능한 품목이라고.
▲메모리 반도체는 특정 기능을 더 빠르게 더 작게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그 기술적 특성이 우리 사회의 장점과 잘 맞아떨어졌다.
-메모리를 양궁에 비메모리를 클레이 사격에 비유한 대목이 절묘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양궁을 잘하지요? 메모리 반도체는 명확한 과녁에 쏘는 양궁 같은 기술이에요. 정밀한 미세 공정으로 불량률을 최소화해서 계속 10점을 쏘는 식이죠.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메모리는 읽고 쓰는 기능이 기본이에요. 목표가 뚜렷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잘 모르고 “우리도 CPU, 비메모리를 키워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지만, 쉽지 않아요. 우리가 10년 전, 20년 전에 AI 칩이나 스마트폰 칩(AP)이 필요할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제가 1997년에 처음 비메모리 사업부 책임을 맡았을 때 총매출액이 10억 불 정도였어요. 내려올 때 150억 불쯤 됐어요. 그 정도 성장도 자그마치 10년이 걸렸어요. 그만큼 어려워요. 명문대 수석하고 싶은 건 모든 이들의 희망 사항이죠. 그런데 비메모리 잘 되는 나라를 보세요. 절대 강자는 (엔비디아, 애플이 있는) 미국이에요.
비메모리는 움직이는 과녁을 상대로 해요. 미국만 유일하게 시스템을 계속 정의하면서 가고 있어요. 지난 20년간 미국은 움직이는 과녁을 쏘는 클레이 사격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업은 일본도 유럽도 어려워요.”
-파운드리(위탁 생산)의 위상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요?
“2005년에 내가 파운드리 팀을 만들었을 때, 우리 기술은 대만의 TSMC보다 3세대 정도 뒤처져 있었어요. 지금은 기술 자체로는 비슷해요. 계속 잘해 나간다는 가정하에, TSMC와 삼성은 같이 가야 합니다. 갑자기 ‘내후년에 우리가 TSMC를 이기겠다’ 무리하게 열을 낼 필요 없어요. “너도 좀 먹고 나도 좀 먹을게.” 이 정도의 레이스가 좋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결국 ‘소품종 초 대량생산’을 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했다. 성실함으로 정밀함을 높여온 ‘궁수의 나라’는 HBM으로 지금 추격자의 열매를 따 먹고 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다른 정체성의 인재가 필요하다고 쓴소리를 더 했다.
▲TSMC 대만 파운드리 라인(팹16) 외부 모습. /TSMC
-한 나라가 인재를 어떻게 쓰고 있는가에 따라 그 나라의 비전과 방향이 달라집니다. 중국의 인재는 공대로, 미국은 법대로, 한국은 의대로 가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세계의 탤런트를 다 쓸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에요. 미국 본토의 엘리트는 법대로 간다지만, 외국의 천재들은 다 미국에서 창업하려고 몰려가죠. 실리콘밸리는 2/3가 이민자고 최고 부자들도 다 이민자예요. 일론 머스크도 젠슨 황도 다 이민자잖아. 중국도 별종이지만, 어쨌든 미국은 ‘안되는 것 빼고 다 하라’는 포용적인 시스템이 떠받치고 있어요.”
한국, 일본, 유럽은 지금 다 같이 헤매고 있다고 했다. “유럽도 노벨상만 받았지, 20년이 넘도록 새로운 인더스트리를 못 만들었어요. ‘어떤 인재를 키워야 할까?’ 그건 제도가 말해줘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유치원 의대반부터 늦은 밤까지 ‘틀리지 않는 기술’만 배우잖아요. 그걸로 어떻게 AI를 이기겠어요?”
시급한 건 입시제도를 고치는 건데, 권력을 가진 기득권이 그 역할을 안 하고 있다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녀분은 어떻게 양육하셨습니까?
“우리 딸은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한 적이 없어요. 본인도 싫다고 했는데 그래서 명문대는 못 갔어요(웃음). “아빠가 그렇게 교육해서 불행하냐?” 물었더니 행복하대요. 그럼 된 거예요. 꼭 명문대 나와야 행복한 건 아니니까. 그랬더니 딸이 자기 아이들도 학원을 안 보내요. 그게 맞는 것 같다고. 하지만 자기도 불안하지, 하하. 내가 걱정말라고 했어요.
10년 지나면 인구가 줄어서 인서울 대학에 전국 학생들 다 채우고도 남을 거라고. 지방대는 학생을 모시러 다니겠지요. 아니, 대학이라는 게 사실 큰 의미가 없어요. 농담으로 내가 건강 잘 지켜서 손주들 창업이라도 도와주겠다고요. 진심은 그거예요. 사회적 비용만 늘어나고 ROI 안 나오는 이 입시 교육, ‘안 틀리는 기술’ 좀 그만 가르치라고요.”
▲CES2025 삼성전자 전시관 입구
-하지만 삼성이야말로 ‘안 틀리는 기술’을 잘 익힌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요. 모범생들만 모이는 곳 아닙니까?
“그런데 모범생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시키는 일은 잘하지만, 스스로 하는 일은 잘 못해요. 삼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렇습니다. 패스트 팔로워 방식으로 트레이닝 받은 사람은 실수나 낭비가 거의 없어요. 그렇게 낭비 요소를 줄이는 전략으로 한국이 선진국 문턱까지 올 수 있었죠. 하지만 세상이 바뀌니 다들 헤매고 주춤거려요. 한국인이 갑자기 머리가 나빠져서? MZ가 게을러서? 아닙니다.”
권오현의 지적대로 우리 사는 시대는 이미 빠른 추격자에서 빠른 전환자의 시대로 돌아섰다. 바야흐로 부지런한 지능과 거대한 지능의 협연이 필요한 시점. 부지런한 지능은 시간을 단축하고, 거대한 지능은 무수한 데이터 속 패턴을 찾아서 우리가 모르던 깨달음을 전해준다.
땅을 접어서 달리는 축지법을 쓰는 사람들,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지만 예측하고 ‘적정화’하는 클레이 사격형 인재가 절실한 타이밍이다.
-어떤 제도가 최적의 타이밍을 끌어낼 수 있을까요?
“옛날 카피 시대에는 ‘소니를 이기자’ ‘인텔을 이기자’ 같은 분명한 타겟이 있었어요. 지금은 어떤 기술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요. 그래서 무조건 선점이 중요합니다. 선점하려면 제도가 행위를 막아서면 안 돼요. 중국도 실리콘밸리도 열정적으로 연구해요. 잠도 안 자고 그 일만 합니다.
반면 우리는? 근무 시간을 법으로 52시간 규제해 놓으면 못 당해요. 52시간 제도는 블루칼라에는 맞아요. IP, 콘텐츠, 반도체 산업은 달라요. 유연하게 가야죠. 1년 세게 일하고 한 달 휴가 줘도 됩니다.”
▲경기 이천 SK하이닉스 반도체 팹 전경.
새로운 시대가 오면 업의 속도에 맞춰 제도를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AI는 어느 정도 쓰세요?
“저는 실무를 하는 편이 아니라 간단한 것들만 써요. 내가 말하는 건 AI 시대에 맞는 제도예요. 우리 제도가 미국만큼 좋진 않아도, 일본이나 유럽보다는 잘 만들어낼 수 있어요. 제도는 상대적인 거라 조금만 고쳐도 성과가 나요. 그러면 1등은 못해도 2등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골프에서 남들이 ‘더블 보기’ 칠 때, 나는 ‘보기’만 쳐도 되거든요. 너무 이상적인 걸 쫓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질문을 해도 기승전 ‘제도’로 돌아왔다. 책에서 그는 제도를 ‘조직의 주춧돌’로 리더를 ‘조직의 기둥’으로 설명했다. 잘 나가던 기업이 갑자기 쇠퇴하거나 반대로 급성장하는 건 오직 ‘리더’ 때문이었다. 추락하던 마이크로소프트가 CEO 사티아 나델라의 통찰력으로 부활하고, 잘 나가던 인텔이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리더의 부재로 서서히 추락했던 것처럼.
그러나 단기 생존을 넘어 ‘지속 성장’과 더 나은 기회를 찾는 힘은 근본적으로 제도에 있다고 했다. 미국이 남북전쟁과 인종 갈등, 대공황 등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권오현은 ‘제도의 힘’으로 보고 있다. 스타트업처럼 출발한 나라이기에, 정치적으로는 ‘리더의 변동성’을 방어할 최후의 제도를 만들었고, 경제적으로는 ‘안 되는 것 빼고는 다하라’는 유연한 기준으로 산업을 일으켰다는 것.
-하지만 현재 미국은 트럼프 리스크로 전 세계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빅테크 유니콘은 잘 나가지만 기업의 금융화 현상은 심각하며, 40년 동안 사회 인프라와 제조업은 붕괴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런 어려움을 이용해서 트럼프가 갈라치기 해서 대통령이 됐어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도가 좋으니 대법관이 막아서고, 트럼프는 2년 뒤면 교체됩니다. 미국의 시스템이 다 좋다는 건 아니지만 기업 입장, 경영자 입장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가장 나아요.
지난 10년을 봐도, 최근 3년을 봐도 미국만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10년 전 EU의 GDP 총합이 미국하고 같았는데, 지금은 미국이 두 배쯤 될 거예요. 유럽은 새로운 인더스트리를 못 만드는데 미국은 만들고 있잖아요. 250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한 유일한 국가가 미국이에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최강대국이 됐고, 트럼프 리스크가 심해도 앞으로 30~40년간 미국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아요. 그 기초가 바로 ‘네거티브 시스템’ 즉 ‘안되는 것 빼고 다 하라’는 허용적인 시스템입니다.”
미국이 중국 기술 성장을 견제하면서 ‘벌어준 시간’을 한국이 잘 활용하지 않는다면, 추월당하는 건 순식간이라고 했다.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굴기를 이끌고 있는 기업 중 하나로 알려진 루이리(Lui-li) IC는 연내 D램 생산장비를 투입해 내년부터 본격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리더 이야기를 해보지요.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이병철, 정주영을 노이즈 속에서 시그널을 읽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촉은 어떻게 생깁니까?
“골방에서 면벽하면 도사는 되겠지만, 촉이 좋은 리더는 못됩니다. 촉은 다양한 사람 만나고 세상의 흐름 속에 있어야 생겨요. 흐름을 알려면 내 비즈니스 밖의 사람,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을 자주 만나냐 해요.”
골프 선수가 맨날 골프 얘기만 하면 골프 말고 뭘 알겠느냐고 했다. 카피 시대는 이제 지났으니 역사 전공하다가 생물학으로 튀는 서양인들처럼 사방으로 열려 있으라고 부추겼다. CEO의 통찰력은 ‘누굴 만나는지’ 보면 다 가늠이 되더라고. 그 자신, 사장된 이후로 주말에 출근을 안 했다고 했다.
“주말이면 예술가 만나고 PD들 만나러 다녔어요. 기자하고 정치가만 빼고는 다 만나고 다녔어요.”
-놀랍습니다. 삼성을 포함해서 주요 그룹 임원 중에 주말에 출근을 안 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요.
“나는 제너럴한 쪽은 아니었어요(웃음). 좀 이상하게 행동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어떻게 안 쫓겨났느냐? 나는 적자 사업부를 많이 맡았어요. 그렇게 발령을 많이 받았어요. R&D하다가 메모리 하다가 적자 사업부를 맡은 거예요.
다행히 나는 겁이 좀 없었어요. ‘쫓겨나도 굶어 죽긴 하겠어.’ 이런 베짱이랄까. 무엇보다 호기심이 시키는 데로 일을 했더니, 턴어라운드가 됐어요.‘ 주말도 안 나오고 칼퇴근하고, 저 사람 맨날 노는 거 아니야?’ 주변에서 의심해도, 일단 일이 잘되니 용납이 됐어요. 전교 1등 하면 아무도 안 건드리잖아요(웃음).
그런데 그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직원들을 잘 키워서예요. 기독교도 예수님이 뛴 게 아니라 제자들이 뛰어서 지금까지 왔잖아요.”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주역인 삼성전자 개발팀의 모습. 사진 가운데가 당시 개발팀장이었던 권오현.
-하지만 위임만큼 어려운 것도 없지요.
“나는 아랫사람 볶아치러 회사 오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냉장고 정리하고 유통기한 검사하고 싶으면, 집에 가서 해라. 회사 오면 직급에 걸맞은 일을 해야지.” 불안하다고 자기가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면 아랫사람이 크질 못해요. 카피 시대엔 틀리는 게 죄악이니까 상사한테 깨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안 됩니다. 실패하더라도 시켜야죠.
실수하더라도 그 부하직원이 실력이 늘잖아요. 패스트 무버 시대에는 부하직원과 경쟁하면 안 돼요. 경쟁사와 경쟁하고 미래와 경쟁해야죠.”
-경영자 시절 본인이 내린 가장 의미 있는 결정과 의미 있는 실패는 무엇이었습니까?
“미래에 투자한 일은 다 성공했어요. 3D NAND(반도체를 옆이 아닌 수직으로 쌓아 올려 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린 기술)도 삼성이 독점하다 다른 기업들이 쫓아왔어요. 그때 또 한 번 다음 단계로 판을 바꿨어요. 진짜 1등이 되려면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합니다. 내가 더 잘하는 걸 하면 돈은 벌겠지만, 피곤하게 살아야 해요(웃음).
삼성 디스플레이 시절에 대형 LCD 사업을 축소하고 모바일 OLED로 전환한 것도 기억나요. 흑자 사업이었지만, 쇠퇴하는 사업으로 판단되면 접어요. ‘이익이 나고 있다’고 해도 호통을 쳐요.
“당신 아들이 여기서 일하게 할 거냐?”고. 내리막길을 걷는 사업은 접고 성장 산업으로 돌려야 해요. 미래가 중요해요.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 지금 반도체, 방산, 조선 말고는 업황이 좋은 게 없잖아요.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계속 업을 정의해나가야 해요. 실패를 자산 삼아서.”
▲반도체 슈퍼 모멘텀에 취한 우리에게 다음 스텝을 이야기하는 권오현의 ‘다시 초격차’
-삼성도 HBM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실패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2024년 10월, 3분기 잠정 실적 발표 직후에 반성문까지 쓸 정도로 뼈아픈 실패를 선언했었지요.
“HBM은 내가 대표하던 시절에 만들었어요. 전영현 사장이 그때 사업부장이었는데 HBM2를 만들어서 엔비디아에 100%를 납품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이익률이 떨어지니까 재무적 판단을 해버렸어요.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거죠. 쉽게 말해 자식이 시험 성적 좀 떨어졌다고 아예 공부를 안 시킨 거예요.
결국 HBM은 SK하이닉스에 가서 대박이 났어요. 당장 돈이 안 된다고 버리면 이렇게 뼈아픈 결과를 맞아요. 삼성뿐 아니라 한국의 기업들을 보면 지금 잠재 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이 사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나온 궤적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지점은 없는지요? 스스로 운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까?
“돌아보면 나는 모범생은 아니었어요. 내가 했던 경영도 삼성의 대표적 경영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나는 어쩌면 이상한 경영을 한 거예요. 열심히 한 사람도 아니었어요. 브레인은 열심히 돌렸지만, 피지컬리 열심히 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다만 학창 시절부터 ‘틀리면 어떡하지?’ 보다는 ‘틀려도 한번 해볼게’ 쪽이었어요. ‘이렇게 하면 더 낫지 않을까요?’ 선생님께 얘기라도 해보는 아이였죠.
운을 이야기하자면, 50년생부터 65년생까지는 다 운 좋은 세대였어요. 고속 성장기를 살았으니 진짜 럭키한 거죠. 그중에서도 나는 더 운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75년도에 대학을 졸업하고 카이스트 석사로 반도체라는 학문을 처음 배운 거예요. 한국엔 반도체 산업이라는 게 아예 없을 때였어요.
실리콘밸리에 있는 스탠퍼드대학으로 유학을 간 것도 절묘했어요. 이병철 회장이 1983년에 반도체를 시작하면서, 한국에 반도체를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 졸업하자마자 저를 부르셨어요. 그게 다 천운이 아니면 뭐겠어요? 그런 타이밍이 아니었다면 내가 크게 쓰일 수 있었겠어요? 삼성이 그때 반도체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나는 미국에서 교수나 하며 늙어갔을 거예요.”
자신 같은 베이비부머는 수혜를 누린 세대지만, 나침반 없이 방황하는 청년들을 보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낯빛이 어두워졌다. 미래의 기대치가 없어 결혼도 출산도 중단한 다음 세대를 위해 답답해서 책을 썼노라고.
▲그는 초격차의 비밀은 인간 본성에 있다고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겐 어떤 리더가 필요합니까? 어떤 경영자에게 가장 많이 배우셨어요?
“미래를 생각하는 리더. 진짜 그거 하나예요. 이건희 회장은 한 번도 나한테 지시를 내린 적이 없어요. ‘매출 얼마야?’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리더가 매출만 질문하면 그 조직은 평생 발전을 못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앞으로 어떤 미래가 오는지? 뭘 준비해야 하는지? 인재는 어떻게 키울 건지?’ 같은 질문만 집요하게 던졌어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어서, 저는 또 나름의 로직을 치열하게 연구했어요.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어느 타겟을 맞춰야 하는지 정답은 없어요. 계속 시도하고 시스템을 정의하도록, 리더가 길을 열어줘야지요.
실무적으로 조언하자면 리더는 자신에게 온 공을 빨리 패스해야 합니다. 나는 문자도 메일도 보는 즉시 답을 줬어요. 공을 갖고 뭉개면 남는 건 번아웃입니다. 메시도 호날두도 전체 경기 중 공 소유 시간은 1분이 채 안 돼요. 오래 갖고 있으면 공격당하고 부상만 잦죠. 결정적일 때 해결사 역할을 하면 됩니다.”
권오현은 초격차의 비밀은 인간 본성에 있다고 했다. 탐험하고 한계에 도전하는 본성이 바로 초격차의 비밀이었다고. 그 자신, 적자 사업을 맡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결정을 내렸던 순간들이 모여 ‘결단력’이 자랐던 것처럼, 과감하게 위임하고 질문하라고. 결국 의미와 흥미, 재미와 보상이 있는 곳에 자석처럼 사람이 모인다는 말에 오래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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