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릴게임 ┞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
페이지 정보

본문
릴게임모바일 ♩ 사이다쿨접속방법 ㏏
릴게임끝판왕 바로가기 go !!
파타고니아 창업자이자 현 회장, 세계에서 꼽히는 혁명적 등반가이자 한국 등반사에서도 진한 발자취를 남긴 이본 취나드(87세)가 지난 1월 6일 조용히 한국을 방문했다. 7일 서울 우이동 CAC산악문화센터에서 열린 한국산악회 명예회원 추대식에 참석한 취나드 모습. 지난 2022년 약 4조 원에 달하는 파타고니아 지분 전체를 비영리재단에 기부한 바 있는 취나드는 평소 그의 진정성 있는 행보와 같이 떠들썩한 언론의 주목을 피해 산악인들과 직접 호흡하며 소통하는 기회를 가졌다. 한국산악회는 그가 한국 등반사에 남긴 업적을 기려 이날 9번째 명예회원으로 추대했다.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세계적인 산악인이자 파타고니아 창립자인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가 한국산악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됐다. 한국산악회는 1월 7일 이본 취나드를 제9대 명예회원으로 공식 추대하며, 한국 산악계와의 오랜 인연과 그의 등반·환경 철학을 기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본 취나드는 1938년생으로 올해 87세다. 1950년대부터 시에 바다이야기2 라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며 로열 로빈스, 톰 프로스트 등 요세미티를 대표하는 클라이머들과 함께 미국 암벽등반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그는 1962년부터 2년간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며,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한국 등반 발전 앞당긴 크랙 루트 파인딩
1963년 가을, 취나드는 당시 국내 산악계에서 흔치 않던 전통 멀 바다이야기무료머니 티피치 클라이밍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한국 산악인 선우중옥, 이강오와 함께 북한산 인수봉을 찾았다. 그해 이들이 개척한 '취나드 A'와 '취나드 B' 루트는 인수봉 동북벽의 크랙과 슬랩을 따라 자연 그대로 암벽을 오르는 전통 등반 방식으로 설계됐다.
취나드 A는 인수봉 동북벽 오른쪽에서 시작해 약 180m, 5개의 피치로 이어지는 고난도 오션파라다이스예시 전통 루트다. 크랙과 자유등반 기술을 필요로 하며 숙련된 클라이머에게 도전 욕구를 일으킨다. 취나드 B는 약 177m, 난이도 5.8 수준의 전통 루트로 크랙·슬랩·침니 등반이 혼합된 구간이 특징이며, 당시 국내 클라이머들에게 새로운 등반 방식의 경험을 제공했다.
취나드 루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트래드 등반 개념을 한국 암벽에 맨 처 바다신릴게임 음 체계적으로 적용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의 암벽등반은 확보 개념이 충분히 정립되지 않았고, 크랙을 적극 활용하는 클린 프로텍션 문화 역시 자리 잡지 못한 상태였다.
취나드는 미국 요세미티에서 사용하던 너트·슬링 중심의 장비 운용과 크랙 위주의 루트 파인딩 방식을 인수봉에 그대로 도입했다. 특히 그가 미국에서 창안한 취나드 이큅먼트의 장비들을 직접 공수해 한국 암벽에 처음 선보이며, 바위를 훼손하지 않고 지형의 특성을 활용해 스스로 확보를 만들어가는 등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명확히 제시했다. 이는 단순한 외국인의 루트 개척을 넘어, 등반 철학과 기술 체계가 함께 유입된 사건으로 평가된다.
1979년 선인봉 등반 시 유기수가 촬영한 사진을 낱장 앨범으로 선물했다. 앨범 선물 전달 후 기념촬영. 왼쪽부터 변기태 회장, 김도섭, 이본 취나드, 선우중옥, 유기수.
취나드는 이미 존재하는 길을 반복해 오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고, 바위에는 아직 오르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산악인 선우중옥, 이강오와의 논의를 통해 '스스로 새로운 경로를 개척한다'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전달됐다.
이 루트들은 새로운 등반 발전사를 크게 앞당겼다. 취나드는 한국 등반자들에게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 직접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이는 국내 암벽등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사건으로, 인수봉에서 본격적인 현대 암벽등반 시대의 개막을 알린 역사적 이정표로 평가된다.
이후로도 취나드는 한국 산악계와 인연을 이어왔다. 선우중옥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파타고니아에서 함께 근무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밖에도 1979년 한국산악회 창립 34주년을 맞아 공식 방한, 선인봉 측면길을 등반하고 특별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선등은 박일환(에코클럽)이 맡고 김도섭(에코클럽), 취나드, 유기수, 최영규(마운틴빌라), 박영배(크로니) 순으로 올랐다.
열띤 사인 경쟁. 청중 대부분 파타고니아 옷을 입고 왔다.
한국산악회 80년 역사에서 아홉 번째 명예회원
때때로 한국을 찾았지만, 공식 방한은 이번이 49년 만이다. 취나드는 파타고니아 한국 지사와의 소통을 위해 일본 방문 일정 중 2박3일의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으며, 선우중옥이 연결고리가 되고 한국산악회가 나서 그의 공헌을 기리고 명예회원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취나드는 지난 1월 6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 이튿날 파타고니아 도봉산점을 비롯한 국내 매장을 둘러보고 7일 CAC산악문화센터를 방문해 한국 산악인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50여 명의 산악인들로 자그마한 센터가 발 디딜틈 없이 빼곡히 들어찼다. 원로 산악인들뿐만 아니라 대학산악부까지 연령대를 초월했다. 당초 20~30분으로 예정됐던 행사는 뜨거운 열기 속에 50여 분간 이어졌으며, 행사 후에는 사인과 기념 촬영 요청이 끊이지 않아 관계자들이 진땀을 빼는 모습도 연출됐다.
이날 행사에는 취나드길을 개척했던 선우중옥을 비롯해 1979년 선인봉 등반을 함께했던 유기수, 김도섭 등 한국 암벽등반사의 산증인들이 자리해 의미를 더했다.
변기태 한국산악회 회장은 추대사를 통해 "이본 취나드 선생을 한국산악회 아홉 번째 명예회원으로 모시게 된 것은 80년 한국산악회 역사에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라고 감격해하며 "취나드만큼 깊고 각별한 의미를 지닌 인물은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취나드 A·B 코스가 지닌 상징성은 한국 근대 암벽등반사의 분기점"이라고 강조했다.
미래를 열어갈 차세대 클라이머들과 함께.
실제로 이본 취나드는 1972년 발표한 '클린 클라이밍' 장비 카탈로그를 통해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며, 바위를 손상시키는 장비 대신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바 있다.
산악회는 그의 뜻을 기려 친환경 목재로 제작한 명예회원패를 전달했다. 80년사에 걸쳐 명예회원은 1963년 미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장 노먼 다이렌 퍼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8명에 불과했으며, 취나드는 아홉 번째다.
그는 답사를 통해 "아메리카 알파인클럽과 영국 알파인클럽의 명예회원이기도 한데, 한국 알파인클럽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된 것 역시 매우 명예로운 일"이라며 감사를 전했다.
이어 산악회는 취나드의 49년 만의 방한을 기념해 특별한 선물도 준비했다. 1979년 방한 당시 선인봉 등반 사진으로 제작한 낱장 앨범으로, 당시 사진을 촬영했던 유기수가 직접 전달했다.
옛 동료들과 재회한 취나드는 "그때 찍은 사진을 이렇게 다시 꺼내 보게 될 줄 몰랐다"며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바라보았다. 그는 "유기수가 살아 있어 정말 반갑다. 당시 함께 근무하던 사람들은 다 세상을 떴다"며 넉살을 펼쳤다.
"나는 매우 불량한 군인이었다, 한국에서의 등반이 나를 살려"
이어 취나드의 특별강연이 시작됐다. 주한미군 시절 이야기다.
이날 취나드는 1960년대 초 한국에서의 등반 경험과 인수봉 취나드 A·B 루트 개척의 배경을 밝혔다.
이본 취나드는 주한미군 복무가 결정됐을 때만 해도 한국에 등반 문화가 존재하는지 정보가 전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오랜 등반 동료였던 유명 산악인 앨런 스택Alan Steck이 "한국인 클라이머를 안다"며 자신이 알고 지내던 UC 버클리 유학생 선우문옥을 소개한다. 선우문옥은 훗날 인수봉 개척의 주인공 선우중옥의 친형이다.
취나드는 선우문옥을 만나 간단한 등반을 했다. 선우문옥은 "한국에 가게 되면 선우중옥을 찾아가라, 내 동생이다"라고 당부했다.
미국에서 자신을 찾아온 취나드를 선우중옥은 인수봉으로 데려갔다. 처음 마주한 인수봉. 그가 "얼마냐 올라봤냐?"고 묻자, 선우중옥은 "75번"이라고 답했다. 초등은 일본인에 의해서라고 들었다. 취나드는 "그럼 좋다, 우리는 다른 형태의 등반을 하면 어떻겠냐, 여기 루트가 많으니 다른 길로 등반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후 취나드는 취나드 이큅먼트의 장비들을 소개하고 그것을 활용해 등반에 나섰다. 선우중옥은 당시 모든 등반을 미군 군화를 신고 올랐다.
취나드는 미군 신분이었기 때문에 외출 시 사복을 입을 수 없었고, 군복을 입은 채 등반을 다녔다. 그는 스스로를 "매우 불량한 군인이었다"고 표현했다. 일종의 관심 사병을 자초했고, 맡은 일이라고는 보일러 발전기를 켜고 끄는 일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외에는 모두 등반. 규정을 어기고 등반을 나가다 영창에 갈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또 토요일마다 다른 병사에게 돈을 주고 근무를 대신 서게 한 뒤 몰래 부대를 빠져나오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조금만 더 했으면 정말 영창행이었다"고.
취나드와 선우중옥은 신체 사이즈가 같았다. 외출할 때는 선우중옥의 집에 들러 그의 사복을 입고 인수봉으로 향했다. 그는 이 시기를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했지만, 그만큼 간절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It saved my life, because military is... not for me!" 만약 등반이 없었다면 군 복무는 훨씬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1979년 잠깐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에코클럽 김도섭씨와 선인봉 측면길을 오르는 이본 취나드.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장값 없이 겨울 인수봉 올라
눈 쌓인 인수봉도 그대로 올랐다.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절대 장갑을 끼지 않았다. 어떤 때는 리지를 움켜쥐자 손이 바위에 달라붙은 채 얼어버렸다. 얼어붙은 손을 녹이기 위해 물에 담가 녹였다.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강렬한 생의 감각을 느꼈다.
취나드는 "이 바위를 절절히 사랑했다"고 밝혔다. 요세미티와 너무 똑같아서 "그야말로 천국이 아닌가", "특히 크랙이 발달한 인수봉의 암질과 형태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더욱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한국에서의 경험은 단지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끝나지 않았다. 취나드는 "한국에서 배운 것은 '모든 규칙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필요하다면 부수고 우리 방식대로 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고방식이 훗날 파타고니아를 창업하고 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이어졌다고 설명해 감동을 자아냈다.
클라이밍 문화 퇴색... 모두 플라스틱 홀드만 올라
이어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취나드는 오늘날 클라이밍 문화가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우려부터 꺼냈다. 그는 "미국 알파인클럽조차 어느 순간부터 방향을 잃고 스포츠클라이밍 중심의 조직처럼 변해 버렸다고 느낀다"며, "사람들이 스스로를 클라이머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플라스틱 홀드만 오르고 있는 현실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지구 환경이 심각한 위기에 처한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영적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에게 클라이밍을 가르칠 때 반드시 인공암벽만 오르는 것이 진짜 등반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그는 올림픽 실내 클라이밍 종목과 관련해 파타고니아에도 참여 제안이 있었지만 "위험이 없다면 그것은 클라이밍이 아니다Because without any risk, it's not climbing"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밝혔다. 스포츠클라이밍은 체조에 가깝고 신문 스포츠면에 실릴 경기일 뿐이며, 진짜 클라이밍은 경쟁 종목이 아니라 삶을 건 '열정'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등반은 기록보다 순간의 몰입으로 남는 경험
인수봉 취나드 코스 초등 당시의 기억을 묻자 그는 특유의 유머로 분위기를 풀었다. "나는 이제 87세이다. 솔직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기억이 3초밖에 안 된다는 '레드피시' 이야기를 꺼내 좌중을 웃게 했다. "다만 구체적인 장면은 흐릿해졌어도, 평생에 걸친 등반의 감각과 철학만큼은 몸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루트에서 세컨드가 "어떻게 올라왔느냐"고 물으면 자신도 기억이 나지 않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등반은 기록보다 순간의 몰입으로 남는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장비 개발과 관련한 질문에는 스스로를 발명가라기보다 혁신가라고 규정했다. 그는 어떤 물건이든 더 낫게 고칠 수 있는 여지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며, 지금 입고 있는 파타고니아 다운 재킷을 보면서도 "보온성과 품질은 훌륭하지만 원단이 얇아 쉽게 찢어진다. '만약 케블라처럼 강한 폴리에틸렌 계열 섬유로 바꾼다면 거의 손상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자동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발명가가 '0을 1로 만드는 사람'이라면, 자신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끊임없이 개선해 '1을 100으로 키우는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커브드 피크 아이스액스 역시 이런 집요한 문제의식과 개선 욕구에서 탄생했다는 맥락이었다.
볼트 개척과 환경 훼손 논란에 대해서는, 나이가 들수록 바위와 나무, 자연 전체가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인간 역시 그 일부라는 인식이 깊어질수록, 바위에 구멍을 뚫거나 나무를 베어내는 행위에 점점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연에 상처를 내는 방식의 개척은 하지 않으며, 그저 야영을 하고, 바위에 조용히 매달려 시간을 보내고, 흙 위에서 잠을 자며 자연과 연결되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래드 루트에서의 과도한 볼트 사용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그가 본 최악의 사례는 유럽의 한 암벽으로, 3m마다 볼트가 박혀 있어 사실상 위험이 제거된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위험이 없는 것은 등반이 아니다"라는 그의 신념은 에베레스트 상업등반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졌다. 셰르파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돈과 장비로 모든 위험을 제거한 채 정상에 서는 것은 타협일 뿐 진정한 등반이 아니며, 그렇게 올라간 사람은 시작할 때도, 내려올 때도 여전히 '바보'일 뿐이라는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
정상이 아니라, 영적·신체적 변화가 진짜 등반
거산을 오르는 이유는 정상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이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이며, 위험과 선택이 배제된 과정은 이미 등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적인 실력을 지닌 한 후배가 루트 중간에서 볼트를 발견하자 그 순간 "더 이상 이건 내가 오를 길이 아니다"라며 하강해 버린 일화를 소개하며, 그 결단이야말로 등반의 본질을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젊고 가난하지만 열정만은 가득한 산악인들에게 전한 조언은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에서 나왔다. 그는 돈 한 푼 없던 시절, 여름 내내 등반을 다니며 찌그러진 고양이용 통조림을 사 먹었고, 한 캔에 5센트 하던 그 통조림의 맛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고 했다. 가난은 분명 힘들었지만, 그때만큼 삶이 선명했던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랜드테톤에서 생존을 위해 다람쥐를 잡아먹었던 일화까지 유머 섞어 들려주며, 위험하고 궁핍했지만 그 모든 순간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그의 답변은 단순한 기술 조언을 넘어, 등반을 통해 자연과 맺는 관계,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변화하는 경험의 가치를 일관되게 강조하는 철학적 메시지로 이어졌다. 예정된 시간이 훌쩍 넘어 사회자가 몇 차례 "마지막 질문"을 외쳤지만, 청중 누구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세계적인 산악인이자 파타고니아 창립자인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가 한국산악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됐다. 한국산악회는 1월 7일 이본 취나드를 제9대 명예회원으로 공식 추대하며, 한국 산악계와의 오랜 인연과 그의 등반·환경 철학을 기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본 취나드는 1938년생으로 올해 87세다. 1950년대부터 시에 바다이야기2 라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며 로열 로빈스, 톰 프로스트 등 요세미티를 대표하는 클라이머들과 함께 미국 암벽등반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그는 1962년부터 2년간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며,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한국 등반 발전 앞당긴 크랙 루트 파인딩
1963년 가을, 취나드는 당시 국내 산악계에서 흔치 않던 전통 멀 바다이야기무료머니 티피치 클라이밍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한국 산악인 선우중옥, 이강오와 함께 북한산 인수봉을 찾았다. 그해 이들이 개척한 '취나드 A'와 '취나드 B' 루트는 인수봉 동북벽의 크랙과 슬랩을 따라 자연 그대로 암벽을 오르는 전통 등반 방식으로 설계됐다.
취나드 A는 인수봉 동북벽 오른쪽에서 시작해 약 180m, 5개의 피치로 이어지는 고난도 오션파라다이스예시 전통 루트다. 크랙과 자유등반 기술을 필요로 하며 숙련된 클라이머에게 도전 욕구를 일으킨다. 취나드 B는 약 177m, 난이도 5.8 수준의 전통 루트로 크랙·슬랩·침니 등반이 혼합된 구간이 특징이며, 당시 국내 클라이머들에게 새로운 등반 방식의 경험을 제공했다.
취나드 루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트래드 등반 개념을 한국 암벽에 맨 처 바다신릴게임 음 체계적으로 적용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의 암벽등반은 확보 개념이 충분히 정립되지 않았고, 크랙을 적극 활용하는 클린 프로텍션 문화 역시 자리 잡지 못한 상태였다.
취나드는 미국 요세미티에서 사용하던 너트·슬링 중심의 장비 운용과 크랙 위주의 루트 파인딩 방식을 인수봉에 그대로 도입했다. 특히 그가 미국에서 창안한 취나드 이큅먼트의 장비들을 직접 공수해 한국 암벽에 처음 선보이며, 바위를 훼손하지 않고 지형의 특성을 활용해 스스로 확보를 만들어가는 등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명확히 제시했다. 이는 단순한 외국인의 루트 개척을 넘어, 등반 철학과 기술 체계가 함께 유입된 사건으로 평가된다.
1979년 선인봉 등반 시 유기수가 촬영한 사진을 낱장 앨범으로 선물했다. 앨범 선물 전달 후 기념촬영. 왼쪽부터 변기태 회장, 김도섭, 이본 취나드, 선우중옥, 유기수.
취나드는 이미 존재하는 길을 반복해 오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고, 바위에는 아직 오르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산악인 선우중옥, 이강오와의 논의를 통해 '스스로 새로운 경로를 개척한다'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전달됐다.
이 루트들은 새로운 등반 발전사를 크게 앞당겼다. 취나드는 한국 등반자들에게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 직접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이는 국내 암벽등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사건으로, 인수봉에서 본격적인 현대 암벽등반 시대의 개막을 알린 역사적 이정표로 평가된다.
이후로도 취나드는 한국 산악계와 인연을 이어왔다. 선우중옥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파타고니아에서 함께 근무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밖에도 1979년 한국산악회 창립 34주년을 맞아 공식 방한, 선인봉 측면길을 등반하고 특별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선등은 박일환(에코클럽)이 맡고 김도섭(에코클럽), 취나드, 유기수, 최영규(마운틴빌라), 박영배(크로니) 순으로 올랐다.
열띤 사인 경쟁. 청중 대부분 파타고니아 옷을 입고 왔다.
한국산악회 80년 역사에서 아홉 번째 명예회원
때때로 한국을 찾았지만, 공식 방한은 이번이 49년 만이다. 취나드는 파타고니아 한국 지사와의 소통을 위해 일본 방문 일정 중 2박3일의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으며, 선우중옥이 연결고리가 되고 한국산악회가 나서 그의 공헌을 기리고 명예회원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취나드는 지난 1월 6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 이튿날 파타고니아 도봉산점을 비롯한 국내 매장을 둘러보고 7일 CAC산악문화센터를 방문해 한국 산악인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50여 명의 산악인들로 자그마한 센터가 발 디딜틈 없이 빼곡히 들어찼다. 원로 산악인들뿐만 아니라 대학산악부까지 연령대를 초월했다. 당초 20~30분으로 예정됐던 행사는 뜨거운 열기 속에 50여 분간 이어졌으며, 행사 후에는 사인과 기념 촬영 요청이 끊이지 않아 관계자들이 진땀을 빼는 모습도 연출됐다.
이날 행사에는 취나드길을 개척했던 선우중옥을 비롯해 1979년 선인봉 등반을 함께했던 유기수, 김도섭 등 한국 암벽등반사의 산증인들이 자리해 의미를 더했다.
변기태 한국산악회 회장은 추대사를 통해 "이본 취나드 선생을 한국산악회 아홉 번째 명예회원으로 모시게 된 것은 80년 한국산악회 역사에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라고 감격해하며 "취나드만큼 깊고 각별한 의미를 지닌 인물은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취나드 A·B 코스가 지닌 상징성은 한국 근대 암벽등반사의 분기점"이라고 강조했다.
미래를 열어갈 차세대 클라이머들과 함께.
실제로 이본 취나드는 1972년 발표한 '클린 클라이밍' 장비 카탈로그를 통해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며, 바위를 손상시키는 장비 대신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바 있다.
산악회는 그의 뜻을 기려 친환경 목재로 제작한 명예회원패를 전달했다. 80년사에 걸쳐 명예회원은 1963년 미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장 노먼 다이렌 퍼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8명에 불과했으며, 취나드는 아홉 번째다.
그는 답사를 통해 "아메리카 알파인클럽과 영국 알파인클럽의 명예회원이기도 한데, 한국 알파인클럽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된 것 역시 매우 명예로운 일"이라며 감사를 전했다.
이어 산악회는 취나드의 49년 만의 방한을 기념해 특별한 선물도 준비했다. 1979년 방한 당시 선인봉 등반 사진으로 제작한 낱장 앨범으로, 당시 사진을 촬영했던 유기수가 직접 전달했다.
옛 동료들과 재회한 취나드는 "그때 찍은 사진을 이렇게 다시 꺼내 보게 될 줄 몰랐다"며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바라보았다. 그는 "유기수가 살아 있어 정말 반갑다. 당시 함께 근무하던 사람들은 다 세상을 떴다"며 넉살을 펼쳤다.
"나는 매우 불량한 군인이었다, 한국에서의 등반이 나를 살려"
이어 취나드의 특별강연이 시작됐다. 주한미군 시절 이야기다.
이날 취나드는 1960년대 초 한국에서의 등반 경험과 인수봉 취나드 A·B 루트 개척의 배경을 밝혔다.
이본 취나드는 주한미군 복무가 결정됐을 때만 해도 한국에 등반 문화가 존재하는지 정보가 전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오랜 등반 동료였던 유명 산악인 앨런 스택Alan Steck이 "한국인 클라이머를 안다"며 자신이 알고 지내던 UC 버클리 유학생 선우문옥을 소개한다. 선우문옥은 훗날 인수봉 개척의 주인공 선우중옥의 친형이다.
취나드는 선우문옥을 만나 간단한 등반을 했다. 선우문옥은 "한국에 가게 되면 선우중옥을 찾아가라, 내 동생이다"라고 당부했다.
미국에서 자신을 찾아온 취나드를 선우중옥은 인수봉으로 데려갔다. 처음 마주한 인수봉. 그가 "얼마냐 올라봤냐?"고 묻자, 선우중옥은 "75번"이라고 답했다. 초등은 일본인에 의해서라고 들었다. 취나드는 "그럼 좋다, 우리는 다른 형태의 등반을 하면 어떻겠냐, 여기 루트가 많으니 다른 길로 등반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후 취나드는 취나드 이큅먼트의 장비들을 소개하고 그것을 활용해 등반에 나섰다. 선우중옥은 당시 모든 등반을 미군 군화를 신고 올랐다.
취나드는 미군 신분이었기 때문에 외출 시 사복을 입을 수 없었고, 군복을 입은 채 등반을 다녔다. 그는 스스로를 "매우 불량한 군인이었다"고 표현했다. 일종의 관심 사병을 자초했고, 맡은 일이라고는 보일러 발전기를 켜고 끄는 일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외에는 모두 등반. 규정을 어기고 등반을 나가다 영창에 갈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또 토요일마다 다른 병사에게 돈을 주고 근무를 대신 서게 한 뒤 몰래 부대를 빠져나오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조금만 더 했으면 정말 영창행이었다"고.
취나드와 선우중옥은 신체 사이즈가 같았다. 외출할 때는 선우중옥의 집에 들러 그의 사복을 입고 인수봉으로 향했다. 그는 이 시기를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했지만, 그만큼 간절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It saved my life, because military is... not for me!" 만약 등반이 없었다면 군 복무는 훨씬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1979년 잠깐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에코클럽 김도섭씨와 선인봉 측면길을 오르는 이본 취나드.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장값 없이 겨울 인수봉 올라
눈 쌓인 인수봉도 그대로 올랐다.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절대 장갑을 끼지 않았다. 어떤 때는 리지를 움켜쥐자 손이 바위에 달라붙은 채 얼어버렸다. 얼어붙은 손을 녹이기 위해 물에 담가 녹였다.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강렬한 생의 감각을 느꼈다.
취나드는 "이 바위를 절절히 사랑했다"고 밝혔다. 요세미티와 너무 똑같아서 "그야말로 천국이 아닌가", "특히 크랙이 발달한 인수봉의 암질과 형태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더욱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한국에서의 경험은 단지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끝나지 않았다. 취나드는 "한국에서 배운 것은 '모든 규칙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필요하다면 부수고 우리 방식대로 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고방식이 훗날 파타고니아를 창업하고 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이어졌다고 설명해 감동을 자아냈다.
클라이밍 문화 퇴색... 모두 플라스틱 홀드만 올라
이어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취나드는 오늘날 클라이밍 문화가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우려부터 꺼냈다. 그는 "미국 알파인클럽조차 어느 순간부터 방향을 잃고 스포츠클라이밍 중심의 조직처럼 변해 버렸다고 느낀다"며, "사람들이 스스로를 클라이머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플라스틱 홀드만 오르고 있는 현실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지구 환경이 심각한 위기에 처한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영적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에게 클라이밍을 가르칠 때 반드시 인공암벽만 오르는 것이 진짜 등반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그는 올림픽 실내 클라이밍 종목과 관련해 파타고니아에도 참여 제안이 있었지만 "위험이 없다면 그것은 클라이밍이 아니다Because without any risk, it's not climbing"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밝혔다. 스포츠클라이밍은 체조에 가깝고 신문 스포츠면에 실릴 경기일 뿐이며, 진짜 클라이밍은 경쟁 종목이 아니라 삶을 건 '열정'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등반은 기록보다 순간의 몰입으로 남는 경험
인수봉 취나드 코스 초등 당시의 기억을 묻자 그는 특유의 유머로 분위기를 풀었다. "나는 이제 87세이다. 솔직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기억이 3초밖에 안 된다는 '레드피시' 이야기를 꺼내 좌중을 웃게 했다. "다만 구체적인 장면은 흐릿해졌어도, 평생에 걸친 등반의 감각과 철학만큼은 몸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루트에서 세컨드가 "어떻게 올라왔느냐"고 물으면 자신도 기억이 나지 않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등반은 기록보다 순간의 몰입으로 남는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장비 개발과 관련한 질문에는 스스로를 발명가라기보다 혁신가라고 규정했다. 그는 어떤 물건이든 더 낫게 고칠 수 있는 여지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며, 지금 입고 있는 파타고니아 다운 재킷을 보면서도 "보온성과 품질은 훌륭하지만 원단이 얇아 쉽게 찢어진다. '만약 케블라처럼 강한 폴리에틸렌 계열 섬유로 바꾼다면 거의 손상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자동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발명가가 '0을 1로 만드는 사람'이라면, 자신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끊임없이 개선해 '1을 100으로 키우는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커브드 피크 아이스액스 역시 이런 집요한 문제의식과 개선 욕구에서 탄생했다는 맥락이었다.
볼트 개척과 환경 훼손 논란에 대해서는, 나이가 들수록 바위와 나무, 자연 전체가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인간 역시 그 일부라는 인식이 깊어질수록, 바위에 구멍을 뚫거나 나무를 베어내는 행위에 점점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연에 상처를 내는 방식의 개척은 하지 않으며, 그저 야영을 하고, 바위에 조용히 매달려 시간을 보내고, 흙 위에서 잠을 자며 자연과 연결되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래드 루트에서의 과도한 볼트 사용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그가 본 최악의 사례는 유럽의 한 암벽으로, 3m마다 볼트가 박혀 있어 사실상 위험이 제거된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위험이 없는 것은 등반이 아니다"라는 그의 신념은 에베레스트 상업등반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졌다. 셰르파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돈과 장비로 모든 위험을 제거한 채 정상에 서는 것은 타협일 뿐 진정한 등반이 아니며, 그렇게 올라간 사람은 시작할 때도, 내려올 때도 여전히 '바보'일 뿐이라는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
정상이 아니라, 영적·신체적 변화가 진짜 등반
거산을 오르는 이유는 정상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이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이며, 위험과 선택이 배제된 과정은 이미 등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적인 실력을 지닌 한 후배가 루트 중간에서 볼트를 발견하자 그 순간 "더 이상 이건 내가 오를 길이 아니다"라며 하강해 버린 일화를 소개하며, 그 결단이야말로 등반의 본질을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젊고 가난하지만 열정만은 가득한 산악인들에게 전한 조언은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에서 나왔다. 그는 돈 한 푼 없던 시절, 여름 내내 등반을 다니며 찌그러진 고양이용 통조림을 사 먹었고, 한 캔에 5센트 하던 그 통조림의 맛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고 했다. 가난은 분명 힘들었지만, 그때만큼 삶이 선명했던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랜드테톤에서 생존을 위해 다람쥐를 잡아먹었던 일화까지 유머 섞어 들려주며, 위험하고 궁핍했지만 그 모든 순간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그의 답변은 단순한 기술 조언을 넘어, 등반을 통해 자연과 맺는 관계,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변화하는 경험의 가치를 일관되게 강조하는 철학적 메시지로 이어졌다. 예정된 시간이 훌쩍 넘어 사회자가 몇 차례 "마지막 질문"을 외쳤지만, 청중 누구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관련링크
-
http://28.rcd029.top
0회 연결 -
http://31.rgm734.top
0회 연결
- 이전글태아보험 비교, 무엇을 중심으로 봐야 할까요? 26.02.22
- 다음글야마토게임방법┓ 〚 Rub748¸TOP 〛 ㎔백경게임 바다이야기pc버전 오리지널바다이야기 ┼ 26.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