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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노동권익센터가 주최한 '2025 제3회 감정·비정규 노동자 수기 공모전' 수상작 중 하나로, 감정·비정규직 노동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필자의 동의하에 오마이뉴스 게재용으로 일부 편집·구성하였습니다. <기자말>
[부산노동권익센터]
"뭐 연세도 있으신데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전들 어떻게 합니까? 솔직히 우리 모두 처음부터 매일 욕먹을 각오하고 월급 받는 것 아닌가요? 정 힘드시면..."
"아니, 그런 뜻이 아니..."
2016년 어느 날이었다. 나는 50대 후반에 막 어느 카드사 하청 콜센터의 텔레마케터 릴게임야마토 로 일을 시작했다. 창밖, 너무나 좋아하는 접시꽃이 환장하게 피어 있었다. 나는 그날 나이 어린 센터장의 조금은 무례한 언사에 불쾌했지만 이내 하던 말을 얼버무렸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나는 눈물을 참으려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떼가 오후 세 시를 가르며 절망의 첫 자음 'ㅈ' 자로 날아가고 있었다.
사실 그 당시는 텔레마케팅 무경 오리지널바다이야기 력자도 어느 정도 콜센터에 취업할 수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그 일자리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이직률이 꽤 높다고 하는데도 텔레마케터 면접이라도 보려면 최하 콜센터 인턴 경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구직 사이트에는 수시로 텔레마케팅 구인공고가 뜬다. 그만큼 갈수록 세상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지는 것 같다.
2015년, 릴게임야마토 나는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났다. 단단히 믿었던 협력사는 등을 돌렸고 오래도록 친절했던 거래은행도 태도를 싹 바꿨다. 그러나 이 척박한 시대, 나는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정직하게 돌아보면 사업에 대한 당시 내 과욕과 판단 실수도 컸었다.
나는 허름한 단독주택 반지하 월세방으로 몰렸고 가족들의 내일은 캄캄해졌다. 바다이야기게임방법 그해 가을 어느 밤, 나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양화대교 난간 근처에 홀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술병을 쥔 내 손이 덜덜덜 떨렸고 하늘은 빙빙 돌았다. 그 아래 멀리 희미하게 선유도공원이 보였다. 그 공원으로 바뀌기 전 수돗물 정수장 시설이 있던 터다. 내가 한때 열정적으로 자재를 납품하며 땀을 뻘뻘 흘리던 일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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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끝에서 잡은 희망 (양화대교) 사업 부도 후 삶의 벼랑 끝에 몰려 양화대교를 찾았던 주인공의 뒷모습입니다. 어둡고 차가운 강바람 속에서 휴대폰 불빛만이 유일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 부산노동권익센터
"여보, 너무 사랑해요. 나쁜 마음 절대 먹으면 안 돼요. 친정 오빠가 우리를 도와준다고 했어요. 그러니 우리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제발 전화 좀 받으세요."
아내가 내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내 전화기에는 부재중만 찍혔다. 그러자 아내의 문자 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젊은 날 연애 시절부터 내 심리를 마법사처럼 꿰고 있었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누구와 사업재개 문제로 대화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아내가 빨리 오라며 한없이 엉엉 울었다. 나는 문득 택시 기사의 애환을 다룬 그 당시 '자이언티'의 유명한 노래 '양화대교'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희미한 한강의 불빛이 거꾸로 내 근황을 물으며 불안하게 깜박였다. 그래, 나와 아내는 꼭 행복해야 했다.
가여운 아내가 빨리 보고 싶었다. 무던히도 쪼들리던 나였지만 그 양화대교에서 급히 택시를 탔다. 그리고 집 앞에서 내리면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내 가슴에 홀로 떠돌던 '자이언티'의 그 노래가 택시 기사의 얼굴에 몇 움큼 가물가물 오버랩 되었다. 그날 독한 마음을 먹고 한강으로 출발했던 나는 새 옷이 필요 없었다. 너무나 허름한 옷차림의 나를 어리둥절한 표정의 택시 기사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도 내게 그 '양화대교'는 아주 특별한 의미의 다리다. 중국계 미국인 지리학자 '이-푸 투안 (Yi-Fu Tuan)' 박사는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엄격히 구분했다. 내 아픔이 서린 '양화대교'로 예를 들면 '공간'으로서의 그 다리는 그냥 사람들이 알고 있는 추상적인 초대형 교랑일 뿐이다. 그러나 그 교량에서 누군가 삶의 커다란 반전을 맞이했다면 그 교량이라는 '공간'은 그 사람만의 구체적 '장소'로 바뀐다. 그러므로 그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던 내 외출의 종착지 '양화대교'는 내겐 그립고 아픈 '장소'다.
나는 부도 후 블록 공사장 허드렛일을 찾았다. 여기저기가 멍들고 이유도 모르게 피가 났지만 버텼다. 그러나 단 이틀 일하고 내내 못마땅한 얼굴을 하던 작업반장에게 쫓겨났다. 육신은 늙고 거친 노동에 서툰 내게는 당연한 퇴짜였을 것이다. 그 후로도 나를 받아주는 공사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급해진 나는 사무라도 보는 업체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오십 후반을 바라보는 나를 채용해주는 사무직은 더욱 없었다.
그 후 아내의 친정 오빠가 우리의 숨통을 일부 틔워줬다. 그러나 언제까지 처남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구직 사이트에서 운명처럼 텔레마케터를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텔레마케터는 그 어떤 자격증이 없어도 열정만 있으면 가능했다. 깨금발로 서 있는 나는 배고픈 열정이 있었다.
마침내 면접 날이었다. 나는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면접장으로 들어섰다. 강한 인상의 한 면접관이 텔레마케터는 여성이 더 나은 직종이고 나이도 너무 많다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비굴할 만큼 두 손을 모아 계속 비는 시늉을 했다. 그런 내가 너무나 미웠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살아야만 했다. 다행히 연세 있어 보이는 면접위원장이 그 면접관을 제지하더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알았다고 했다.
마침내 나는 어느 콜센터 계약직 텔레마케터가 되었다. 오는 전화만 받는 인바운드로 최저 시급을 조금 넘는 박봉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다. 나는 곧바로 이론과 상담 예절 QA 강사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육 내내 그 어떤 막말에도 견뎌내야 한다며 나를 다그쳤다. 그러나 아직 쓰디쓴 그 바닥을 잘 모르던 나는 고객 앞에서 당당하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첫날부터 강행군이었다. 카드의 특성과 그 카드사의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정책을 다 암기하고 업그레이드된 업무 내용까지 수시로 순발력 있게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적지 않은 교육생들이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나 나는 일전에 공사장에서 겪었던 수모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 50대 늦깎이 신입사원의 좁은 방 (콜센터) 50대 후반의 나이에 텔레마케터로 취업한 주인공의 치열한 일터입니다. 젊은 상담원들 사이, 좁은 파티션(칸막이) 속에 앉아 긴장된 등으로 업무를 보는 중년 남성의 고단함이 느껴집니다. '먼지 없는 공장'이라 불리는 감정노동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 부산노동권익센터
작은 칸막이가 쳐진 공간이 우리 가족의 밥을 책임지는 좁은 일터였다. 나는 더는 회사의 대표가 아니었다. 아침이면 컴퓨터 모니터와 볼펜이 지친 나를 무심히 기다렸다. 나는 종일 먼지 없는 공장 같은 그 숨 막힌 곳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모두 침묵한 채 그 자리에서 빠르게 도시락을 먹었다. 지친 동료 상담사들은 자신들의 앞가림하기에도 벅찼다. 거대한 자본은 우리들의 감정을 조종했다. 내 감정이 죽고 고객의 감정에 맞추면 자본가의 매출은 증대하는 슬픈 방이었다.
"씨* 니가 책임질 거야! 꼴에 같잖은 일 하면서 갑질하는 거야, 뭐야! 목소리 들어보니 늙은 * 같은데 곧 쫓겨나겠군! 똑바로 해! 책임자가 누구야! 당장 전화 바꿔!"
"고객님, 욕은 하지 마십시오. 고객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고객님의 상황 그대로만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희가 해결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 오후 많이 피곤해져 있을 때였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또 다른 진상 고객을 다시 만났다. 사실 그 술 취한 고객의 의뢰 건은 법률상 구제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억지 고객에게 전혀 죄송하지도 않았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교육받은 대로 공감의 언어를 후렴처럼 반복해서 사용했다. 그리고 고객에게 공격적으로 들릴 가능성이 있는 '요'나 '죠' 대신 '오'와 '다'로 정중히 답했다.
사실 처음에는 종종 듣는 욕설과 하대를 견디기가 힘겨웠다. 그러나 차츰 적응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가슴에 비애가 피어났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분노도 섞여 있었다. 성인이 되어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센터장님을 찾아가 상처받은 나를 상담했다. 내가 생각해봐도 눈에 띄게 비틀거리던 나는 상사에게 작은 위로의 말이라도 들으며 치유 받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센터장님으로부터 냉랭한 답만 돌아왔다. 처음부터 센터장의 정답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우연히 내 곁에 서 있던 다른 상담원은 애써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날 센터장님도 매일 원청의 실적 평가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얼른 웃으며 이해하기로 했다. 우리는 자주 이해해야 했다. 이곳은 한 사람이 떠나면 새로 들어올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 서 있는 곳이다. 그날도 나는 그렇게 억지로 웃으며 죽어갔다.
우리가 가장 긴장하는 시간은 고객분들의 점심 바로 전인 오전 11시부터 12시, 그리고 역시 그분들의 퇴근 전인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다. 고객분들은 무슨 공식처럼 바로 그 시간대에 가장 상담을 많이 한다. 그분들은 우리 상담사들의 입장보다 자신들의 점심시간이나 퇴근 시간은 뺏기지 않으려 한다. 우리끼리는 하루 중 그 시간대를 역설적으로 고객들과 가장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는 시간이라며 서로 위로한다.
우리는 고객들이 횡설수설할 때 많이 힘들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 상담사의 잘못인 '오류 안내' 다. 만약 그 실수로 고객들에게 경제적 손실이라도 입히게 되면 우리 센터는 본청으로부터 위아래 모두 심각한 추궁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센터 관리자들은 매일 업무 전 그 경고를 반복하고 기계처럼 친절도 강조한다. 나는 그때마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특별히 직종 특성상 텔레마케터는 시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노안이 시작된 나는 매일 고통스러웠다.
더욱이 관리자들은 컴퓨터 모니터로 우리들의 업무 내용을 계속 모니터링한다. 고객들이 대기한다는 신호의 '대기', 내가 화장실 등에 잠시 가는 '이석', 방금 끝난 고객과의 상담 이력을 기록하는 '후처리'가 그대로 관리자에게 전송된다. 그 중 '대기' 숫자가 많아지거나 '후처리'가 길어지면 관리자들이 상담실에 급히 찾아와 추궁할 때도 있다. 물론 우리 현장 상담사만이 아니라 관리자들도 모두 각자의 상처와 스트레스로 대부분 귓병과 마음의 병을 얻는다.
그 후 나는 텔레마케터들의 평균 근무 시간을 넘기며 1년 넘게 그 일을 했다. 관리자들도 무던한 나를 차츰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만 태연함을 가장했을 뿐 감정적으로 상당히 소진된 상태였다. 그즈음 평소 나를 잘 배려하던 아내도 내게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을 진즉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집에서 서로 텔레마케팅에 대해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가끔 아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다. 물론 아내는 나 몰래 가끔 울고 있을 터였다.
"이 책, 당신 생일 선물...다른 뜻은 없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시간은 흘러 다음 해 내 생일이 돌아왔다. 나는 여러 여건상 휴가를 낼 수 없었다. 그 상황을 잘 아는 아내가 그날은 출근하는 나를 이상하게 길게 배웅했다. 그리고 주춤거리더니 불쑥 책 한 권을 건넸다. '마크 맨슨(Mark Manson)'의 명저 <신경 끄기의 기술> 번역판이었다. 아내는 그 책을 내게 건네며 내가 오해할까 봐 뒷말은 작은 소리로 달았다. 그 의미에 동의하는 나는 얼른 호응해줬다.
▲ 지하철 위로의 시간 (퇴근길 독서) 흔들리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아내가 선물한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장면입니다. 고된 하루 끝, 책 속의 문장들을 통해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라는 깨달음과 치유를 얻는 주인공의 내면을 따뜻하고 차분한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 부산노동권익센터
나는 너무 피곤했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그 책을 대략 훑어보았다. 한 줄 한 줄 읽어가던 나는 조금씩 놀라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신이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어떤 형태로든 타자의 불합리한 요구나 공격에 힘들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평범하다. 우리는 화려한 활자나 이미지의 SNS와는 달리 대체로 비슷한 고통과 번뇌로 그럭저럭 살아간다. 따라서 누구든 비슷한 고통을 겪기에 하루하루 힘겨워도 담담히 이겨내라는 요지였다. 나는 의외로 그 짧은 시간에 상당한 치유를 받았다.
다행히 내게도 매번 힘겨운 고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상담 끝에 내게 따스한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는 분도 계셨다. 그 인간적인 목소리는 지쳐가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생명수 같았다. 사실 텔레마케터로서 받는 보수는 상당히 낮다. 그러나 내게 우리 가족들의 삶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희망은 심어줬다. 나는 그 시절 처음으로 감사의 제목이 아주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1년쯤 지난 어느 날 내게 또 다른 희망이 찾아왔다. 나는 오래전 내 도움을 크게 받았던 의리 있는 동료의 배려로 과거 몸담았던 일을 조금씩 하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 '길이 끝나면'의 마지막 연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라는 구절을 신봉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름 정들었던 텔레마케팅 회사를 퇴사했다. 다행히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되어 매사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선생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건강 생각하시면서 힘내십시오. 별의별 고객들이 많으시죠? 그래도 화이팅입니다!"
"고객님...너무 감사합니다. 여기서 이런 전화는 처음..."
얼마 전이었다. 나는 통신 관련 전화 상담을 했다. 내 전화를 받은 인바운드 텔레마케터는 분명 교육받으신 대로 차분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내심 내게 혹여 실수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중간중간 거꾸로 그 상담사에게 호응의 인사를 건넸다. 그분은 감격하고 당황한 듯 목소리가 떨리더니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그분이 우시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상담사는 바로 전 고객에게 인격적 큰 모욕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 맞잡은 손의 온기 (공감과 연대) 세월이 흘러 70대가 된 주인공이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택배 기사의 손을 꼭 잡아주는 장면입니다. 과거 자신이 겪었던 감정노동의 아픔을 알기에, 현재 땀 흘리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감사와 위로를 '맞잡은 두 손'으로 형상화했습니다.
ⓒ 부산노동권익센터
나는 요즘 택배 노동자들을 대할 때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엘리베이터에서는 그분들이 고객의 집 호수 앞에 짐을 놓고 다시 급히 복귀할 때까지 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주거나 함께 빠르게 짐을 옮겨준다. 한번은 어느 택배기사분이 그런 내 손을 꼭 잡아주시더니 눈이 촉촉해질 때도 있었다.
그리고 카드 배송사에서 카드를 전달할 당사자가 없어 두리번거리는 배달사에게는 얼른 대신 받아준다. 그분들은 대부분 노령이시다. 그런 내게 고마움을 표시하면 내가 그분들보다 더 행복해진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 구역 담당 우편물 집배원의 물건 배송 완료 문자가 오면 정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늘 건강을 조심하라는 등의 조금은 긴 인사말을 전송한다. 과거 내가 텔레마케터 시절 고객들이 보내온 따스한 말 한마디가 나를 버티게 해줬던 기억 때문이다. 여기저기 배달하시느라 많이 바쁘실 그분들도 놀랍게도 대부분 조금은 긴 따스한 답신을 보내온다. 사랑은 그렇게 전염되는 것 같다.
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 자살한 어린 실업계고 출신 콜센터 현장 실습생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제75회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도 선정되어 처절하게 스크린에 올려진 작품이다.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선정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 다시는 제2, 제3의 소희가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
▲ 보이지 않는 응원 (다시 찾은 그곳) 과거 자신이 일했던 콜센터 건물 앞, 퇴근하는 후배 노동자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노신사의 뒷모습입니다. 제각기 사연을 안고 치열한 하루를 보낸 그들에게 "무너지지 말고 힘내라"며 마음속으로 깊은 경의와 응원을 보내는 뭉클한 엔딩 장면입니다.
ⓒ 부산노동권익센터
지난봄, 나는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는 10여 년 전 그 텔레마케팅 센터의 퇴근 시간에 맞춰 가보았다. 어둠이 햇발들을 망보며 자기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지난날로 태엽을 감아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그리움인지 통증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쏟아져 나오는 텔레마케터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두 특별한 재주나 소위 괜찮은 자격증도 없이 제각각 힘든 사연을 담고 한 가정을 이끌어가거나 일원일 것이다. 그분들에게 내심 귀엣말하듯 응원하고 경의를 표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울컥해졌다.
나도 이제 칠순이 다 됐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이라도 내 가족처럼 서로 나누고 도우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나는 세상의 모든 감정 노동자들이 무너지지 않고 그 힘든 인생의 여정이 조금씩 더 나아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부산노동권익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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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릴게임야마토 나는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났다. 단단히 믿었던 협력사는 등을 돌렸고 오래도록 친절했던 거래은행도 태도를 싹 바꿨다. 그러나 이 척박한 시대, 나는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정직하게 돌아보면 사업에 대한 당시 내 과욕과 판단 실수도 컸었다.
나는 허름한 단독주택 반지하 월세방으로 몰렸고 가족들의 내일은 캄캄해졌다. 바다이야기게임방법 그해 가을 어느 밤, 나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양화대교 난간 근처에 홀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술병을 쥔 내 손이 덜덜덜 떨렸고 하늘은 빙빙 돌았다. 그 아래 멀리 희미하게 선유도공원이 보였다. 그 공원으로 바뀌기 전 수돗물 정수장 시설이 있던 터다. 내가 한때 열정적으로 자재를 납품하며 땀을 뻘뻘 흘리던 일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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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노동권익센터
"여보, 너무 사랑해요. 나쁜 마음 절대 먹으면 안 돼요. 친정 오빠가 우리를 도와준다고 했어요. 그러니 우리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제발 전화 좀 받으세요."
아내가 내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내 전화기에는 부재중만 찍혔다. 그러자 아내의 문자 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젊은 날 연애 시절부터 내 심리를 마법사처럼 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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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아내가 빨리 보고 싶었다. 무던히도 쪼들리던 나였지만 그 양화대교에서 급히 택시를 탔다. 그리고 집 앞에서 내리면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내 가슴에 홀로 떠돌던 '자이언티'의 그 노래가 택시 기사의 얼굴에 몇 움큼 가물가물 오버랩 되었다. 그날 독한 마음을 먹고 한강으로 출발했던 나는 새 옷이 필요 없었다. 너무나 허름한 옷차림의 나를 어리둥절한 표정의 택시 기사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도 내게 그 '양화대교'는 아주 특별한 의미의 다리다. 중국계 미국인 지리학자 '이-푸 투안 (Yi-Fu Tuan)' 박사는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엄격히 구분했다. 내 아픔이 서린 '양화대교'로 예를 들면 '공간'으로서의 그 다리는 그냥 사람들이 알고 있는 추상적인 초대형 교랑일 뿐이다. 그러나 그 교량에서 누군가 삶의 커다란 반전을 맞이했다면 그 교량이라는 '공간'은 그 사람만의 구체적 '장소'로 바뀐다. 그러므로 그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던 내 외출의 종착지 '양화대교'는 내겐 그립고 아픈 '장소'다.
나는 부도 후 블록 공사장 허드렛일을 찾았다. 여기저기가 멍들고 이유도 모르게 피가 났지만 버텼다. 그러나 단 이틀 일하고 내내 못마땅한 얼굴을 하던 작업반장에게 쫓겨났다. 육신은 늙고 거친 노동에 서툰 내게는 당연한 퇴짜였을 것이다. 그 후로도 나를 받아주는 공사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급해진 나는 사무라도 보는 업체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오십 후반을 바라보는 나를 채용해주는 사무직은 더욱 없었다.
그 후 아내의 친정 오빠가 우리의 숨통을 일부 틔워줬다. 그러나 언제까지 처남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구직 사이트에서 운명처럼 텔레마케터를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텔레마케터는 그 어떤 자격증이 없어도 열정만 있으면 가능했다. 깨금발로 서 있는 나는 배고픈 열정이 있었다.
마침내 면접 날이었다. 나는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면접장으로 들어섰다. 강한 인상의 한 면접관이 텔레마케터는 여성이 더 나은 직종이고 나이도 너무 많다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비굴할 만큼 두 손을 모아 계속 비는 시늉을 했다. 그런 내가 너무나 미웠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살아야만 했다. 다행히 연세 있어 보이는 면접위원장이 그 면접관을 제지하더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알았다고 했다.
마침내 나는 어느 콜센터 계약직 텔레마케터가 되었다. 오는 전화만 받는 인바운드로 최저 시급을 조금 넘는 박봉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다. 나는 곧바로 이론과 상담 예절 QA 강사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육 내내 그 어떤 막말에도 견뎌내야 한다며 나를 다그쳤다. 그러나 아직 쓰디쓴 그 바닥을 잘 모르던 나는 고객 앞에서 당당하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첫날부터 강행군이었다. 카드의 특성과 그 카드사의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정책을 다 암기하고 업그레이드된 업무 내용까지 수시로 순발력 있게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적지 않은 교육생들이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나 나는 일전에 공사장에서 겪었던 수모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 50대 늦깎이 신입사원의 좁은 방 (콜센터) 50대 후반의 나이에 텔레마케터로 취업한 주인공의 치열한 일터입니다. 젊은 상담원들 사이, 좁은 파티션(칸막이) 속에 앉아 긴장된 등으로 업무를 보는 중년 남성의 고단함이 느껴집니다. '먼지 없는 공장'이라 불리는 감정노동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 부산노동권익센터
작은 칸막이가 쳐진 공간이 우리 가족의 밥을 책임지는 좁은 일터였다. 나는 더는 회사의 대표가 아니었다. 아침이면 컴퓨터 모니터와 볼펜이 지친 나를 무심히 기다렸다. 나는 종일 먼지 없는 공장 같은 그 숨 막힌 곳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모두 침묵한 채 그 자리에서 빠르게 도시락을 먹었다. 지친 동료 상담사들은 자신들의 앞가림하기에도 벅찼다. 거대한 자본은 우리들의 감정을 조종했다. 내 감정이 죽고 고객의 감정에 맞추면 자본가의 매출은 증대하는 슬픈 방이었다.
"씨* 니가 책임질 거야! 꼴에 같잖은 일 하면서 갑질하는 거야, 뭐야! 목소리 들어보니 늙은 * 같은데 곧 쫓겨나겠군! 똑바로 해! 책임자가 누구야! 당장 전화 바꿔!"
"고객님, 욕은 하지 마십시오. 고객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고객님의 상황 그대로만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희가 해결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 오후 많이 피곤해져 있을 때였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또 다른 진상 고객을 다시 만났다. 사실 그 술 취한 고객의 의뢰 건은 법률상 구제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억지 고객에게 전혀 죄송하지도 않았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교육받은 대로 공감의 언어를 후렴처럼 반복해서 사용했다. 그리고 고객에게 공격적으로 들릴 가능성이 있는 '요'나 '죠' 대신 '오'와 '다'로 정중히 답했다.
사실 처음에는 종종 듣는 욕설과 하대를 견디기가 힘겨웠다. 그러나 차츰 적응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가슴에 비애가 피어났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분노도 섞여 있었다. 성인이 되어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센터장님을 찾아가 상처받은 나를 상담했다. 내가 생각해봐도 눈에 띄게 비틀거리던 나는 상사에게 작은 위로의 말이라도 들으며 치유 받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센터장님으로부터 냉랭한 답만 돌아왔다. 처음부터 센터장의 정답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우연히 내 곁에 서 있던 다른 상담원은 애써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날 센터장님도 매일 원청의 실적 평가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얼른 웃으며 이해하기로 했다. 우리는 자주 이해해야 했다. 이곳은 한 사람이 떠나면 새로 들어올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 서 있는 곳이다. 그날도 나는 그렇게 억지로 웃으며 죽어갔다.
우리가 가장 긴장하는 시간은 고객분들의 점심 바로 전인 오전 11시부터 12시, 그리고 역시 그분들의 퇴근 전인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다. 고객분들은 무슨 공식처럼 바로 그 시간대에 가장 상담을 많이 한다. 그분들은 우리 상담사들의 입장보다 자신들의 점심시간이나 퇴근 시간은 뺏기지 않으려 한다. 우리끼리는 하루 중 그 시간대를 역설적으로 고객들과 가장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는 시간이라며 서로 위로한다.
우리는 고객들이 횡설수설할 때 많이 힘들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 상담사의 잘못인 '오류 안내' 다. 만약 그 실수로 고객들에게 경제적 손실이라도 입히게 되면 우리 센터는 본청으로부터 위아래 모두 심각한 추궁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센터 관리자들은 매일 업무 전 그 경고를 반복하고 기계처럼 친절도 강조한다. 나는 그때마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특별히 직종 특성상 텔레마케터는 시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노안이 시작된 나는 매일 고통스러웠다.
더욱이 관리자들은 컴퓨터 모니터로 우리들의 업무 내용을 계속 모니터링한다. 고객들이 대기한다는 신호의 '대기', 내가 화장실 등에 잠시 가는 '이석', 방금 끝난 고객과의 상담 이력을 기록하는 '후처리'가 그대로 관리자에게 전송된다. 그 중 '대기' 숫자가 많아지거나 '후처리'가 길어지면 관리자들이 상담실에 급히 찾아와 추궁할 때도 있다. 물론 우리 현장 상담사만이 아니라 관리자들도 모두 각자의 상처와 스트레스로 대부분 귓병과 마음의 병을 얻는다.
그 후 나는 텔레마케터들의 평균 근무 시간을 넘기며 1년 넘게 그 일을 했다. 관리자들도 무던한 나를 차츰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만 태연함을 가장했을 뿐 감정적으로 상당히 소진된 상태였다. 그즈음 평소 나를 잘 배려하던 아내도 내게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을 진즉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집에서 서로 텔레마케팅에 대해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가끔 아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다. 물론 아내는 나 몰래 가끔 울고 있을 터였다.
"이 책, 당신 생일 선물...다른 뜻은 없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시간은 흘러 다음 해 내 생일이 돌아왔다. 나는 여러 여건상 휴가를 낼 수 없었다. 그 상황을 잘 아는 아내가 그날은 출근하는 나를 이상하게 길게 배웅했다. 그리고 주춤거리더니 불쑥 책 한 권을 건넸다. '마크 맨슨(Mark Manson)'의 명저 <신경 끄기의 기술> 번역판이었다. 아내는 그 책을 내게 건네며 내가 오해할까 봐 뒷말은 작은 소리로 달았다. 그 의미에 동의하는 나는 얼른 호응해줬다.
▲ 지하철 위로의 시간 (퇴근길 독서) 흔들리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아내가 선물한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장면입니다. 고된 하루 끝, 책 속의 문장들을 통해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라는 깨달음과 치유를 얻는 주인공의 내면을 따뜻하고 차분한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 부산노동권익센터
나는 너무 피곤했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그 책을 대략 훑어보았다. 한 줄 한 줄 읽어가던 나는 조금씩 놀라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신이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어떤 형태로든 타자의 불합리한 요구나 공격에 힘들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평범하다. 우리는 화려한 활자나 이미지의 SNS와는 달리 대체로 비슷한 고통과 번뇌로 그럭저럭 살아간다. 따라서 누구든 비슷한 고통을 겪기에 하루하루 힘겨워도 담담히 이겨내라는 요지였다. 나는 의외로 그 짧은 시간에 상당한 치유를 받았다.
다행히 내게도 매번 힘겨운 고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상담 끝에 내게 따스한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는 분도 계셨다. 그 인간적인 목소리는 지쳐가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생명수 같았다. 사실 텔레마케터로서 받는 보수는 상당히 낮다. 그러나 내게 우리 가족들의 삶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희망은 심어줬다. 나는 그 시절 처음으로 감사의 제목이 아주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1년쯤 지난 어느 날 내게 또 다른 희망이 찾아왔다. 나는 오래전 내 도움을 크게 받았던 의리 있는 동료의 배려로 과거 몸담았던 일을 조금씩 하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 '길이 끝나면'의 마지막 연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라는 구절을 신봉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름 정들었던 텔레마케팅 회사를 퇴사했다. 다행히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되어 매사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선생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건강 생각하시면서 힘내십시오. 별의별 고객들이 많으시죠? 그래도 화이팅입니다!"
"고객님...너무 감사합니다. 여기서 이런 전화는 처음..."
얼마 전이었다. 나는 통신 관련 전화 상담을 했다. 내 전화를 받은 인바운드 텔레마케터는 분명 교육받으신 대로 차분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내심 내게 혹여 실수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중간중간 거꾸로 그 상담사에게 호응의 인사를 건넸다. 그분은 감격하고 당황한 듯 목소리가 떨리더니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그분이 우시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상담사는 바로 전 고객에게 인격적 큰 모욕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 맞잡은 손의 온기 (공감과 연대) 세월이 흘러 70대가 된 주인공이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택배 기사의 손을 꼭 잡아주는 장면입니다. 과거 자신이 겪었던 감정노동의 아픔을 알기에, 현재 땀 흘리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감사와 위로를 '맞잡은 두 손'으로 형상화했습니다.
ⓒ 부산노동권익센터
나는 요즘 택배 노동자들을 대할 때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엘리베이터에서는 그분들이 고객의 집 호수 앞에 짐을 놓고 다시 급히 복귀할 때까지 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주거나 함께 빠르게 짐을 옮겨준다. 한번은 어느 택배기사분이 그런 내 손을 꼭 잡아주시더니 눈이 촉촉해질 때도 있었다.
그리고 카드 배송사에서 카드를 전달할 당사자가 없어 두리번거리는 배달사에게는 얼른 대신 받아준다. 그분들은 대부분 노령이시다. 그런 내게 고마움을 표시하면 내가 그분들보다 더 행복해진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 구역 담당 우편물 집배원의 물건 배송 완료 문자가 오면 정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늘 건강을 조심하라는 등의 조금은 긴 인사말을 전송한다. 과거 내가 텔레마케터 시절 고객들이 보내온 따스한 말 한마디가 나를 버티게 해줬던 기억 때문이다. 여기저기 배달하시느라 많이 바쁘실 그분들도 놀랍게도 대부분 조금은 긴 따스한 답신을 보내온다. 사랑은 그렇게 전염되는 것 같다.
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 자살한 어린 실업계고 출신 콜센터 현장 실습생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제75회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도 선정되어 처절하게 스크린에 올려진 작품이다.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선정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 다시는 제2, 제3의 소희가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
▲ 보이지 않는 응원 (다시 찾은 그곳) 과거 자신이 일했던 콜센터 건물 앞, 퇴근하는 후배 노동자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노신사의 뒷모습입니다. 제각기 사연을 안고 치열한 하루를 보낸 그들에게 "무너지지 말고 힘내라"며 마음속으로 깊은 경의와 응원을 보내는 뭉클한 엔딩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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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나는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는 10여 년 전 그 텔레마케팅 센터의 퇴근 시간에 맞춰 가보았다. 어둠이 햇발들을 망보며 자기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지난날로 태엽을 감아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그리움인지 통증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쏟아져 나오는 텔레마케터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두 특별한 재주나 소위 괜찮은 자격증도 없이 제각각 힘든 사연을 담고 한 가정을 이끌어가거나 일원일 것이다. 그분들에게 내심 귀엣말하듯 응원하고 경의를 표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울컥해졌다.
나도 이제 칠순이 다 됐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이라도 내 가족처럼 서로 나누고 도우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나는 세상의 모든 감정 노동자들이 무너지지 않고 그 힘든 인생의 여정이 조금씩 더 나아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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