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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컴백 10년…봄을 부르는 ‘영원한 현역’ 박인희
가수 박인희가 지난 7일 벚꽃이 만발한 여의도에서 봄을 만끽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사람에게도 봄 냄새가 난다. 풀처럼, 나무처럼, 꽃 바다이야기예시 처럼. 그가 3월, 봄에 태어난 데다가 봄 노래를 불렀고, 봄처럼 싱그러운 음색과 미소도 여전하니 흐드러진 벚꽃도 잠시 숨죽여 보는 것 같았다.
박인희(80). 마침 택시 라디오에서 그가 부른 ‘봄이 오는 길’이 나왔다. 70대 초반의 택시 기사는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가수 박인희요? 저희 같은 7080세대가 모르 릴짱릴게임 면 간첩이죠.”
‘봄이 오는 길’ 첫 소절처럼,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왔다. 다시 돌아온 봄처럼, 그가 가수로 돌아온 지 올해 10년. 박인희의 공연기획사 비전컴퍼니에 따르면 그가 1970년대 발표한 히트곡 모음은 현재 유튜브 총조회 수가 3200만 회를 넘었다. KBS가 제작한 유튜브 단일 영상 ‘불후의 명곡-박인희, 35 카카오야마토 년 만의 첫 무대, 끝이 없는 길’은 1490만 회를 넘었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거리를 그와 함께 걸었다. 꽃들이 꽃샘추위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박인희는 천생 봄을 기다린 듯 말했다. “비바람 몰아쳐도 어차피 오는 고운 손님이잖아요.” 생각해 보니 그의 노래 ‘재회’와 ‘봄이 오는 길’의 가사였다. 달콤하되 담백한 초콜릿을 입안에서 백경릴게임 슬슬 녹여 목으로 넘기다 내놓는 음색. 박인희는 그 목소리로 노래했고, 시를 낭송했고, 라디오 DJ를 했다. 그리고 긴 잠수.
박인희는 숙명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1970년 이필원과 혼성 듀엣 ‘뚜아에무아(프랑스어로 ‘너와 나’)’로 데뷔했다. 1년여간 4개의 앨범을 낼 정도로 정말 음악에 빠졌단다. ‘약속’ ‘세월이 가면’ 등의 노 바다이야기고래 래로 ‘펄시스터즈’와 ‘키보이스’를 제치고 1971년 TBC 가요대상 중창단 부문 대상도 차지했다.
DJ 생활하다 번아웃…한때 미국으로 잠적
박인희(왼쪽)와 이필원은 1971년까지 약 2년간 '뚜아에무아'란 이름의 혼성 듀엣으로 활약했다. [중앙 포토]
Q : 이필원 선생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A : “당시 명동 ‘미도파 살롱’에는 신중현·윤항기·최헌 등 록그룹 진영이, 무교동 ‘세시봉’에는 송창식·윤형주·이장희 등 통기타 본진이 있었죠. 제가 숙명여대 첫 방송국장을 지낸 걸 알았는지 미도파 살롱에서 사회를 봐달라더군요. 공연 뒤에 누가 요청해서 ‘렛 잇 비 미(Let it be me)’ 등 몇 곡을 불렀어요. 그 자리에 있던 이필원씨(둘은 같은 1946년생)가 제게 듀엣 제의를 하더군요.”
Q : 그런데 대상을 받은 그해 해체했어요. A : “당시 사회가 보수적이라 혼성 듀엣을 연인으로 오해하더군요. 이필원씨와 음악적으로 잘 맞았어요. 여기는 네가 하모니, 내가 멜로디. 이렇게 한 번도 어그러지지 않았죠.” 솔로로 나선 박인희는 ‘모닥불’을 먼저 띄웠다. 그는 “(곡이) 터졌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동아방송(DBS) 라디오 DJ로 활동하던 모습. [중앙포토]
Q : 작사가 박건호와 이때 만났죠. A : “1972년 겨울이던가요. 동아방송 라디오 ‘3시의 다이얼’ 진행을 마치고 나오는데 박건호 작사가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제가 작곡하고, 박 작사가가 노랫말을 붙인 ‘모닥불’이 태어났습니다.” ‘모닥불 피워놓고/마주 앉아서…타다가 꺼지는/그 순간까지/우리들의 이야기는/끝이 없어라.’ 이어 ‘봄이 오는 길’이 터졌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봄이 찾아온다네/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하얀 조가비’ ‘방랑자’ ‘끝이 없는 길’ 등도 터졌다. 앨범 중간중간에는 시 낭송도 곁들였다. ‘얼굴’ ‘목마와 숙녀’가 그랬다.
Q : 앨범 속 시 낭송은 최초 아닌가요. A : “아마 그럴 겁니다. 노래 12곡을 취입하고 누군가 스튜디오 불을 끄더군요. 그런데 감정이 솟구친 거예요. 박인환의 시를 넋두리처럼 낭송했어요. ‘봄이 오는 길’의 작곡가 김기웅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는 ‘좋다’며 작곡해 ‘목마와 숙녀’ 배경음악으로 입혔죠. 시 낭송만 있는 앨범도 별도로 내고요.”
Q : 박인환 시인을 유독 좋아하나 봅니다. A : “제가 풍문여고 2학년 때 전국 연극경연대회 출품작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았어요. 2022년 작고하신 김성옥 선생님이 당시 총연출을 맡았는데, 제 공책에 박인환의 시 ‘목마와 소녀’ ‘세월이 가면’을 남겼어요. 그렇게 박인환 시인의 시에 빠지게 됐죠. 그러다 보니 제가 대학 때 지은 시 ‘얼굴’도 사람들이 박 시인의 작품으로 알더라고요(웃음).” ‘쉽게 헤어져 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박인희의 시 ‘얼굴’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서시’ 등과 함께 출판사에서 펴낸 『세계명시선집』에 오르기도 했다. 그 ‘얼굴’의 주인공은 잠시 헤어졌던 풍문여중 단짝 이해인 수녀다.
풍문여중 2학년 때 이해인(본명 이명숙·왼쪽 둘째)과 박인희(본명 박춘호·맨 오른쪽). 박인희의 생일에 이해인이 선물한 소월시집을 사준 기념으로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박인희는 ″내가 복귀하면서 해인이가 이 사진을 언론에 뿌린 것 같다″며 웃었다. [사진 이해인]
Q : 운명적 만남이었나요. A : “풍문여중 입학 전 예비 소집 때 저처럼 긴 갈래머리 아이가 한 명 있더군요. 해인이었어요. 같은 반이 됐는데, 어느 날 제 책상 서랍에 해인이가 짧은 편지를 남겼어요. ‘너랑 한 반이 돼서 너무 좋다’고요. 해인이와의 편지 왕래가 시작됐어요. 그런데 2학년 때 해인이가 부산으로 전학갔어요. 서울역에서 배웅하면서 제 일기를 보여주기도 했어요. 해인이가 수녀가 되면서 내가 방해되겠다 싶어 연락을 끊었어요. 해인이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너는 수녀인 나보다 너무한 것 아니니.’ 노래하고, 결혼하고. 어느 날 명동의 한 모퉁이에서 어느 수녀와 부딪힌 겁니다. 바로 해인이 아니었겠어요!” 운명이었다. 이 이야기는 박인희의 산문집 『우리 둘이는』(1987)에도 나온다. 다시 만난 이해인 수녀가 박인희에게 한 말. “우리 수녀원에 체험 온 학생들이 종종 ‘모닥불’이란 노래를 부르더라. 너도 노래하고 라디오 DJ 한다니 그 가수 만나봐.” 박인희는 듣고만 있다가 이해인 수녀를 집에 데리고 가 자신의 앨범을 들이밀었다. “이 사람?” 둘은 깔깔 웃었다. 그런데, 가수와 시인 이전에 박인희가 정작 하고 싶었던 건 배우였다.
박인희(오른쪽)가 풍문여중 2학년 때 친구 이해인 수녀(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위에서 세번째). [사진 이해인]
Q : 풍문여고 시절 선배들이 쟁쟁했습니다. A : “춘향전 때 3학년이었던 김을동 언니가 방자 역, 손숙 선배가 조연출을 맡았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오디션에 참석하지 않은 손숙 언니가 춘향 역을 못 해 아주 속상했더래요.”
Q : 왜 배우를 안 했습니까. A : “못 한 거죠. ‘실험극단’의 대졸 신인 연극배우 공모에서 수석 합격했어요. 신문에서 그 소식을 본 부모님이 ‘이게 뭐냐’며 반대했어요. 순종했지만, 이후 공연 포스터만 보면 가슴이 뛰고 식은땀이 났어요.”
Q : 가수의 길은 허락했습니까. A : “집에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라고요. 주변에선 해인이처럼 ‘배우 박인희’를 생각했지 ‘가수 박인희’는 생각도 못했던 분이 많은 것 같았어요.”
Q : 그런데 돌연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A : “당시 제가 3개 라디오 생방송을 6시간이나 하고 있었어요. ‘번아웃’이 왔죠. 명색이 팝송을 틀어주는 DJ인데 현지 사정도 알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당장 향한 곳이 나나 무스쿠리 공연장이었어요.”
박인환의 시 좋아해…최초 시 낭송 앨범 내
가수이자 시인, 방송인 박인희가 2016년 3월 국내 복귀 당시 서울 반포동의 스튜디오에서 노래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Q : 사망설까지 나올 정도로 잠적이 길었습니다. A : “(웃음) 그럴 만하죠. 연락을 다 끊었습니다. 그런데도 방송국에서는 줄기차게 연락처를 알아내고는 라디오 DJ를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반년 만에 다시 방송인으로 돌아갔습니다. 1990년대 후반까지요.”
Q : 2016년 가수로는 35년 만에 복귀했습니다. 이유나 계기가 있나요. A : “2010년대 초반 세시봉 열풍이 불었어요. 그 공연기획자가 저를 설득하러 미국에 찾아왔어요. 장장 6시간이나요. ‘저녁 비행기로 돌아가시라’며 거절했어요. 그런데 ‘가수 박인희를 기다리는 4000여 명의 팬이 있다’는 말에 흔들렸어요.” 그는 2016년 국내 무대에 복귀해 12차례의 공연을 치렀다. 매진에 매진이었다. 2024년 연세대 공연에선 티켓을 못 구한 대기자가 1000여 명이라는 말을 듣고는 석 달 만에 앙코르 공연을 펼쳤다. 현재까지 복귀 무대는 21회 열렸다. 박인희는 “해인이가 암에 걸렸다는 것도 복귀 직후 팬이 알려줘 알게 됐다”며 말끝을 흐렸다.
Q : 애착이 가는 곡이 있습니까. A : “음…. 우선 ‘그리운 사람끼리’예요. 제 첫 작사·작곡입니다. 그리고 ‘재회’입니다. 팬들과 다시 만나게 될 걸 알고 불렀을까요.” 그러면서 나직하게, 박인희는 ‘재회’를 불렀다. ‘비바람 몰아쳐도 나는 너에게 가리/어여쁜 모습으로/너도 내게로 오라….’ 박인희는 팬들과의 다음 ‘재회’를 오는 가을쯤으로 구상하고 있다.
‘봄이 오는 길’에서 산책을 마무리하며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팬들이 나이 80에 노래하는 저를 보고 많은 자극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꿈과 열정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봄은 오지 않을까요.”
김홍준 기자
가수 컴백 10년…봄을 부르는 ‘영원한 현역’ 박인희
가수 박인희가 지난 7일 벚꽃이 만발한 여의도에서 봄을 만끽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사람에게도 봄 냄새가 난다. 풀처럼, 나무처럼, 꽃 바다이야기예시 처럼. 그가 3월, 봄에 태어난 데다가 봄 노래를 불렀고, 봄처럼 싱그러운 음색과 미소도 여전하니 흐드러진 벚꽃도 잠시 숨죽여 보는 것 같았다.
박인희(80). 마침 택시 라디오에서 그가 부른 ‘봄이 오는 길’이 나왔다. 70대 초반의 택시 기사는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가수 박인희요? 저희 같은 7080세대가 모르 릴짱릴게임 면 간첩이죠.”
‘봄이 오는 길’ 첫 소절처럼,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왔다. 다시 돌아온 봄처럼, 그가 가수로 돌아온 지 올해 10년. 박인희의 공연기획사 비전컴퍼니에 따르면 그가 1970년대 발표한 히트곡 모음은 현재 유튜브 총조회 수가 3200만 회를 넘었다. KBS가 제작한 유튜브 단일 영상 ‘불후의 명곡-박인희, 35 카카오야마토 년 만의 첫 무대, 끝이 없는 길’은 1490만 회를 넘었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거리를 그와 함께 걸었다. 꽃들이 꽃샘추위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박인희는 천생 봄을 기다린 듯 말했다. “비바람 몰아쳐도 어차피 오는 고운 손님이잖아요.” 생각해 보니 그의 노래 ‘재회’와 ‘봄이 오는 길’의 가사였다. 달콤하되 담백한 초콜릿을 입안에서 백경릴게임 슬슬 녹여 목으로 넘기다 내놓는 음색. 박인희는 그 목소리로 노래했고, 시를 낭송했고, 라디오 DJ를 했다. 그리고 긴 잠수.
박인희는 숙명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1970년 이필원과 혼성 듀엣 ‘뚜아에무아(프랑스어로 ‘너와 나’)’로 데뷔했다. 1년여간 4개의 앨범을 낼 정도로 정말 음악에 빠졌단다. ‘약속’ ‘세월이 가면’ 등의 노 바다이야기고래 래로 ‘펄시스터즈’와 ‘키보이스’를 제치고 1971년 TBC 가요대상 중창단 부문 대상도 차지했다.
DJ 생활하다 번아웃…한때 미국으로 잠적
박인희(왼쪽)와 이필원은 1971년까지 약 2년간 '뚜아에무아'란 이름의 혼성 듀엣으로 활약했다. [중앙 포토]
Q : 이필원 선생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A : “당시 명동 ‘미도파 살롱’에는 신중현·윤항기·최헌 등 록그룹 진영이, 무교동 ‘세시봉’에는 송창식·윤형주·이장희 등 통기타 본진이 있었죠. 제가 숙명여대 첫 방송국장을 지낸 걸 알았는지 미도파 살롱에서 사회를 봐달라더군요. 공연 뒤에 누가 요청해서 ‘렛 잇 비 미(Let it be me)’ 등 몇 곡을 불렀어요. 그 자리에 있던 이필원씨(둘은 같은 1946년생)가 제게 듀엣 제의를 하더군요.”
Q : 그런데 대상을 받은 그해 해체했어요. A : “당시 사회가 보수적이라 혼성 듀엣을 연인으로 오해하더군요. 이필원씨와 음악적으로 잘 맞았어요. 여기는 네가 하모니, 내가 멜로디. 이렇게 한 번도 어그러지지 않았죠.” 솔로로 나선 박인희는 ‘모닥불’을 먼저 띄웠다. 그는 “(곡이) 터졌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동아방송(DBS) 라디오 DJ로 활동하던 모습. [중앙포토]
Q : 작사가 박건호와 이때 만났죠. A : “1972년 겨울이던가요. 동아방송 라디오 ‘3시의 다이얼’ 진행을 마치고 나오는데 박건호 작사가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제가 작곡하고, 박 작사가가 노랫말을 붙인 ‘모닥불’이 태어났습니다.” ‘모닥불 피워놓고/마주 앉아서…타다가 꺼지는/그 순간까지/우리들의 이야기는/끝이 없어라.’ 이어 ‘봄이 오는 길’이 터졌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봄이 찾아온다네/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하얀 조가비’ ‘방랑자’ ‘끝이 없는 길’ 등도 터졌다. 앨범 중간중간에는 시 낭송도 곁들였다. ‘얼굴’ ‘목마와 숙녀’가 그랬다.
Q : 앨범 속 시 낭송은 최초 아닌가요. A : “아마 그럴 겁니다. 노래 12곡을 취입하고 누군가 스튜디오 불을 끄더군요. 그런데 감정이 솟구친 거예요. 박인환의 시를 넋두리처럼 낭송했어요. ‘봄이 오는 길’의 작곡가 김기웅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는 ‘좋다’며 작곡해 ‘목마와 숙녀’ 배경음악으로 입혔죠. 시 낭송만 있는 앨범도 별도로 내고요.”
Q : 박인환 시인을 유독 좋아하나 봅니다. A : “제가 풍문여고 2학년 때 전국 연극경연대회 출품작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았어요. 2022년 작고하신 김성옥 선생님이 당시 총연출을 맡았는데, 제 공책에 박인환의 시 ‘목마와 소녀’ ‘세월이 가면’을 남겼어요. 그렇게 박인환 시인의 시에 빠지게 됐죠. 그러다 보니 제가 대학 때 지은 시 ‘얼굴’도 사람들이 박 시인의 작품으로 알더라고요(웃음).” ‘쉽게 헤어져 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박인희의 시 ‘얼굴’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서시’ 등과 함께 출판사에서 펴낸 『세계명시선집』에 오르기도 했다. 그 ‘얼굴’의 주인공은 잠시 헤어졌던 풍문여중 단짝 이해인 수녀다.
풍문여중 2학년 때 이해인(본명 이명숙·왼쪽 둘째)과 박인희(본명 박춘호·맨 오른쪽). 박인희의 생일에 이해인이 선물한 소월시집을 사준 기념으로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박인희는 ″내가 복귀하면서 해인이가 이 사진을 언론에 뿌린 것 같다″며 웃었다. [사진 이해인]
Q : 운명적 만남이었나요. A : “풍문여중 입학 전 예비 소집 때 저처럼 긴 갈래머리 아이가 한 명 있더군요. 해인이었어요. 같은 반이 됐는데, 어느 날 제 책상 서랍에 해인이가 짧은 편지를 남겼어요. ‘너랑 한 반이 돼서 너무 좋다’고요. 해인이와의 편지 왕래가 시작됐어요. 그런데 2학년 때 해인이가 부산으로 전학갔어요. 서울역에서 배웅하면서 제 일기를 보여주기도 했어요. 해인이가 수녀가 되면서 내가 방해되겠다 싶어 연락을 끊었어요. 해인이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너는 수녀인 나보다 너무한 것 아니니.’ 노래하고, 결혼하고. 어느 날 명동의 한 모퉁이에서 어느 수녀와 부딪힌 겁니다. 바로 해인이 아니었겠어요!” 운명이었다. 이 이야기는 박인희의 산문집 『우리 둘이는』(1987)에도 나온다. 다시 만난 이해인 수녀가 박인희에게 한 말. “우리 수녀원에 체험 온 학생들이 종종 ‘모닥불’이란 노래를 부르더라. 너도 노래하고 라디오 DJ 한다니 그 가수 만나봐.” 박인희는 듣고만 있다가 이해인 수녀를 집에 데리고 가 자신의 앨범을 들이밀었다. “이 사람?” 둘은 깔깔 웃었다. 그런데, 가수와 시인 이전에 박인희가 정작 하고 싶었던 건 배우였다.
박인희(오른쪽)가 풍문여중 2학년 때 친구 이해인 수녀(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위에서 세번째). [사진 이해인]
Q : 풍문여고 시절 선배들이 쟁쟁했습니다. A : “춘향전 때 3학년이었던 김을동 언니가 방자 역, 손숙 선배가 조연출을 맡았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오디션에 참석하지 않은 손숙 언니가 춘향 역을 못 해 아주 속상했더래요.”
Q : 왜 배우를 안 했습니까. A : “못 한 거죠. ‘실험극단’의 대졸 신인 연극배우 공모에서 수석 합격했어요. 신문에서 그 소식을 본 부모님이 ‘이게 뭐냐’며 반대했어요. 순종했지만, 이후 공연 포스터만 보면 가슴이 뛰고 식은땀이 났어요.”
Q : 가수의 길은 허락했습니까. A : “집에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라고요. 주변에선 해인이처럼 ‘배우 박인희’를 생각했지 ‘가수 박인희’는 생각도 못했던 분이 많은 것 같았어요.”
Q : 그런데 돌연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A : “당시 제가 3개 라디오 생방송을 6시간이나 하고 있었어요. ‘번아웃’이 왔죠. 명색이 팝송을 틀어주는 DJ인데 현지 사정도 알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당장 향한 곳이 나나 무스쿠리 공연장이었어요.”
박인환의 시 좋아해…최초 시 낭송 앨범 내
가수이자 시인, 방송인 박인희가 2016년 3월 국내 복귀 당시 서울 반포동의 스튜디오에서 노래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Q : 사망설까지 나올 정도로 잠적이 길었습니다. A : “(웃음) 그럴 만하죠. 연락을 다 끊었습니다. 그런데도 방송국에서는 줄기차게 연락처를 알아내고는 라디오 DJ를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반년 만에 다시 방송인으로 돌아갔습니다. 1990년대 후반까지요.”
Q : 2016년 가수로는 35년 만에 복귀했습니다. 이유나 계기가 있나요. A : “2010년대 초반 세시봉 열풍이 불었어요. 그 공연기획자가 저를 설득하러 미국에 찾아왔어요. 장장 6시간이나요. ‘저녁 비행기로 돌아가시라’며 거절했어요. 그런데 ‘가수 박인희를 기다리는 4000여 명의 팬이 있다’는 말에 흔들렸어요.” 그는 2016년 국내 무대에 복귀해 12차례의 공연을 치렀다. 매진에 매진이었다. 2024년 연세대 공연에선 티켓을 못 구한 대기자가 1000여 명이라는 말을 듣고는 석 달 만에 앙코르 공연을 펼쳤다. 현재까지 복귀 무대는 21회 열렸다. 박인희는 “해인이가 암에 걸렸다는 것도 복귀 직후 팬이 알려줘 알게 됐다”며 말끝을 흐렸다.
Q : 애착이 가는 곡이 있습니까. A : “음…. 우선 ‘그리운 사람끼리’예요. 제 첫 작사·작곡입니다. 그리고 ‘재회’입니다. 팬들과 다시 만나게 될 걸 알고 불렀을까요.” 그러면서 나직하게, 박인희는 ‘재회’를 불렀다. ‘비바람 몰아쳐도 나는 너에게 가리/어여쁜 모습으로/너도 내게로 오라….’ 박인희는 팬들과의 다음 ‘재회’를 오는 가을쯤으로 구상하고 있다.
‘봄이 오는 길’에서 산책을 마무리하며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팬들이 나이 80에 노래하는 저를 보고 많은 자극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꿈과 열정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봄은 오지 않을까요.”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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