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살리는 진짜 솔루션레비트라 지속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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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살리는 진짜 솔루션레비트라 지속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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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다른 약과 병용해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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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상담 사례오해의 벽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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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lotnara.info
1921년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흑인 마을 '그린우드'에서 자행된 백인 폭도들의 살육-약탈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인종 폭력'으로 기억된다. 사건 당시 만 7세 소녀였던 비올라 플레처는 그 사건 최고령 생존자로서 당시의 악몽을 증언하고 법적 정의 실현을 위해 마지막까지 분투했다. 그는 '털사 인종학살'이 추모비나 진상보고서 문건에 갇힐 역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비극임을 삶으로 웅변했지만 법은 그의 정의를 외면했다. blackwallstreet.org
미국 역사는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의 ‘재건 포고 오션릴게임 령’ 이후 약 15년을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라 구분한다. 비로소 노예가 아니라 ‘시민’이 된 흑인들이 학교에 가고, 선거에도 출마하고, 상품으로 뿔뿔이 팔려갔던 가족 친지가 다시 모여 소작농이나 임금노동자로 적으나마 자본을 축적하며 미래를 설계하던 시기.1877년 북부 연방군이 철수하자마자 남부 백인 사회는 그들의 '재건'을 본 골드몽사이트 격화했다. 인종 분리 차별의 ‘짐 크로 법’의 시대. 흑인들은 문해력 시험과 납세 이력 등 새로운 법-제도적 장애물에 가로막혀 투표권을 도로 빼앗겼고, 더는 소유물도 아니어서 더 무자비해진 KKK 등의 테러와 린치를 감당해야 했다. 1896년 연방대법원은 ‘분리하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판결로 그 차별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바다신2게임 인종주의 백래시는 민권법과 투표권법이 제정된 1960년대까지 사실상 적법하게 자행됐다.
오클라호마 털사(Tulsa)의 흑인 마을 그린우드(Greenwood)도 짐 크로 시대의 산물이었다. 1901년 동부 유전 개발로 급성장한 오클라호마는 1907년 주 승격과 동시에 짐 크로 법을 제정했고, 털사가 석유회사 본사와 금융기관 등이 밀집한 거 바다이야기디시 점도시로 흥성해지면서 흑인들은 변두리로 떨려났다. 그들이 주로 정착한 털사 북쪽 그린우드는, 이름과 달리 거의 황무지였다.
1905년 흑인 사업가 오타와 걸리(Ottawa W. Gurley, 1867~1935)가 간선철도(Frisco Railroad) 너머 그린우드 땅 약 5만 평을 매입했다. 그는 주택을 지어 흑인들에게 공급하고 자립 릴게임방법 정착금을 빌려줘 가게를 열고 농지를 개간하게 했다. 그렇게 점차 주민이 불어나고 종자상과 잡화상 등이 잇달아 생겨났다. 인디애나주립대 로스쿨 출신 흑인 변호사 J.B 스트래드퍼드(J.B. Stradford, 1861~1935)는 법률 사무소를 열고 객실 55개 규모의 근사한 호텔을 지었고, 사업가 사이먼 배리(Simon Berry)는 버스회사를 설립했다. 그들 소수의 비전과 헌신 덕에 그린우드는 1차대전 종전 무렵 극장과 은행, 레스토랑, 병원, 의상실과 양복점, 신문사 등 190여 개 사업장을 갖춘 주민 수 1만 명 규모의 자타 공인 ‘블랙 월스트리트’로 변신했다. 브루킹스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당시 그린우드 지구 내 화폐 순환 주기는 평균 19개월에 달했다. 돈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마을 안에서 상점-은행-부동산-교육투자 등으로 순환하며 반복적으로 가치를 창출했다는 의미다.반면 당시 백인 지역 사정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유가가 급락하면서 유정들이 놀기 시작했고, 전장에서 청년들이 돌아오면서 취업난은 더 가중됐다. 그들에게 그린우드는 눈엣가시였다.
백래시성 차별은 동기나 양상 면에서 전통적 차별과 사뭇 다르다. 일방적 권력관계에 기반한 전통적 차별과 달리 권력 재분배에 따른 위기감과 상실감(역차별 정서)으로 촉발되는 백래시성 차별은 기존 질서-기득권 회복이라는 명분에 시기심과 복수심까지 스며 더 격렬해지기 쉽다. “단일 사건으론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인종 폭력”이라 불리는 1921년 5월 31일의 ‘털사 인종학살’이 그렇게 시작됐다.
1921년 5월 31일 밤부터 시작된 16시간여의 학살-약탈로 폐허처럼 변한 그린우드 지구 풍경. 사건 전 그린우드는 미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번영한 흑인지구라는 명성과 더불어 '블랙 월스트리트'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Library of Congress
쌍방 인종 갈등이 빚은 '폭동'으로 규정된 그 사건은 근 100년 뒤 주 정부 진상조사 보고서를 기점으로 백인 폭도들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로 재정의되기 시작했다. '폭동'이었던 탓에 그린우드 주민들은 전 재산을 잃고도 보험금조차 받지 못했고, 이후 주요 상권은 백인들에게 넘어갔다. 사건 직후 폭동 가담자로 연행되는 흑인 주민들. tulsahistory.org
5월 30일, 19세 흑인 구두수선공(Dick Rowland)이 17세 백인 여성 엘리베이터 안내원(Sarah Page)을 성추행한 혐의로 체포됐다. 발이 미끄러져 가볍게 부딪친 게 전부여서 청년은 이내 석방됐지만, 흥분한 백인 군중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다. 그날 밤 그린우드로 몰려간 수천 명의 무장 폭도는 흑인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살해하고, 가게와 집들을 방화-약탈했다. 쌍발기가 소이탄을 퍼부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다음 날까지 약 16시간 동안 자행된, ‘전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그 만행으로 그린우드 35개 블록이 폐허가 됐다. 주택 등 건물 1,200여 채가 사라졌고 흑인 100~300명이 숨지고 8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백인 사상자는 극소수였지만 주방위군과 경찰은 쌍방 폭동으로 규정, 흑인 생존자 수천 명을 강제 연행해 수 주일 동안 감금하고 폐허 정비 등에 강제 동원했다. 마을 지도자들은 주동자로 몰려 재판을 받았지만 백인은 단 한 명도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피해액은 부동산 150만 달러와 동산 75만 달러(2024년 기준 약 4,000만 달러)로 추산됐다. 법-제도에 기반한 백래시성 차별과 폭력의 야만적 효과는 도드라진 소수를 분리-통제함으로써 소수집단의 결속력을 약화하고 저항-재건 의지를 ‘합법적’으로 좌절시킨다는 데 있다. 걸리 등 마을 지도자들은 빈손으로 마을을 떠나야 했고, 가족-재산과 희망까지 잃고 잔류한 생존자들은 상존하는 위협과 공포 속에서 항변은커녕 기억조차 억누르고 살아야 했다. 7세 소녀 비올라 플레처(Viola Fletcher)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오클라호마 코만치 카운티에서 소작농 부부의 8남매 중 둘째(차녀)로 태어난 플레처는 어머니-의붓아버지와 함께 그린우드로 이주해 성장했다. 썩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에겐 집과 일터가 있었다. 플레처는 온 주민이 함께 했던 교회 예배와 소박한 주말 가족 만찬 메뉴, 남매가 함께 거실에 모여 부르던 복음성가의 선율을 100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기억했다.
학살의 밤, 일가족은 거의 맨몸으로 집을 나와 북쪽 약 30마일 거리의 클레어모어(Claremore) 숲으로 피신했다. 어둠 속에서 보고 들은 연기와 화염, 전장을 방불케 하던 총성과 비명소리, 거리에 나뒹굴던 시신들. 함께 피신한 이웃들과 함께 플레처 일가는 반딧불이를 잡아 어둠을 밝히고, 토끼를 사냥해 끼니를 때우고, 두려움에 떨며 셋씩 무리 지어 숲속 간이 화장실을 다녔고, 얼마간 진정된 뒤부터는 떠돌이 천막살이를 하며 농업 노동자로 살아갔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목화 수확 등 일당벌이에 나섰던 플레처는 16세 무렵 언니와 함께 그린우드의 한 백인 잡화점에 취업했다. 그 무렵 그린우드 상권은 백인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전성기 그린우드 흑인들이 진입하지 못한 업종 중 하나가 보험업이었다. 위험 분산을 위해 전국 규모의 재보험 시스템에 의존해야 하는 보험업은 자본금 규모 등 허가 조건과 규제가 까다로웠다. 그래서 흑인들은 소규모 장례-생명보험 외에 재산 보험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건 후 백인 보험사들은 ‘폭동 내란 소요 사태로 인한 손실에 대해서는 보험금 지급을 거부할 수 있다’는 면책조항을 근거로 흑인들이 청구한 1,400여 건의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만 109세의 플레처가 손자 아이크 하워드와 함께 2023년 출간한 자서전 'Don't Let Them Bury My Story' 표지. 우측 상단의 여성이 젊은 시절의 플레처다. blackwallstreet.org
학살 100주년이던 2021년 5월 미 하원 사법 소위 청문회에서 플레처는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내 이웃들은 부자였다. 돈만 많았던 게 아니라 문화적으로, 공동체적 유산으로 우리는 풍요로웠다. 당연히 내 가족에게도 근사한 집이 있었다.(…) 그 모든 게 불과 몇 시간 사이 몽땅 사라졌다.”
플레처는 32년 결혼한 남편(Robert Fletcher)과 함께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로 이주해 2차대전 전시 조선소 용접 보조공으로 일했고, 가정폭력으로 이혼한 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시 털사로 귀향했다. 그는 백인 가정의 가사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전남편과 낳은 아들 등 2남 1녀를 혼자 부양했다. “백인 주인집 설거지를 하다가, 또 어린애를 재우다가, '어쩌면 그들(주인)도 내 유년기를 파괴한 이들 중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고 그는 2023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털사 학살은 근 100년간 ‘폭동(riot)’이었다. 오클라호마의 공립 역사 교과서는 그 사건을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찰은 공식 기록을 지웠고, 마을 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집단 매장된 희생자들도 잊혀갔다. 생존자들 역시 공포의 트라우마와 생존권이 담보된 사회적 압박 속에서 침묵하며 기억조차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사건은 잊힌 역사가 되어갔다.
1995년 4월, 미국과 전 세계를 경악게 한 오클라호마 폭탄테러가 터졌다. 그 사건과 후유증으로 신문이 도배되다시피 하던 그해 5월 31일, 그린우드 문화센터에서 조촐한 행사가 열렸다. 테러에 대한 전국적 관심을 촉매 삼아, 지역 시민 종교단체가 74년 전 사건 생존자와 후손 등을 초대해 마련한 ‘털사 폭동’ 희생자 추모행사였다. 참석자들은 센터 마당 한편에 작은 추모비도 세웠다. 그렇게 사건이 공론화되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청원이 시작되면서 주의회가 97년 진상조사 위원회를 발족했다. 위원회 공식 명칭도 ‘털사 인종 폭동 조사 오클라호마 위원회’였다. 3년 뒤 위원회는 ‘폭동’이 백인 폭도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방적인 '학살'이었고, 시당국과 경찰이 중요 문서들을 파기하는 등 사태의 진실을 고의 은폐해왔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법적 정의도 공적 보상도 이뤄지지 않은 만큼 생존자 및 후손에 대한 직접 배상과 보상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털사 폭동’은 그제야 ‘털사 학살’로 재규정되기 시작했다.
흑인 인권 법률가 등의 주선으로 2003년 당시 생존자 123명과 200여 명의 후손이 시당국을 상대로 첫 연방 소송(Deadmon v. City of Tulsa)을 제기했다. 지방-항소법원은 민권소송 소멸시효(2년)를 들어 소를 기각했고 2005년 연방대법원도 하급 법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꺼지는 듯하던 털사 학살의 법적 정의의 불꽃을 다시 지핀 게 2006년 플레처 등 고령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었다. 당시 106세 최고령 생존자 플레처는 털사 학살이 보고서로 정리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악몽으로 고통받는 개인의 현재진행형 비극이란 사실, 공소시효가 미치지 못하는 국가-공동체의 도덕적 의무가 얽혀 있는 미완의 정의란 사실을, 여러 인터뷰와 국회 증언 등을 통해 역설했다.
플레처는 평생 가난에 허덕이며 만 85세가 될 때까지 가사노동자로 일했다. 수많은 고용주가 연방법 상의 사회보장세(social security tax)를 납부하지 않아 연금 혜택도 못 받은 탓이었다. 그의 아들도, 중등 시절 ‘올 A 우등생’이었다는 손자(Ike Howard)도 학비가 없어 학교를 중퇴하고 군에 입대해야 했다. 그렇게 가난은 대물림됐다.개인과 가계의 자산 형성-축적 과정에 부동산 소유 여부가 결정적인 변수이며, 미국의 인종 차별적 주택 정책(Redlining) 등이 흑인 빈곤-대물림에 끼친 영향에 대한 저서와 논문은 넘쳐난다. 하버드대 주택 경제학자 네이선 넌(Nathan Nunn)은 털사 학살로 인해 2000년 기준 현지 흑인 주민이 주택을 소유할 확률이 26%P 감소한 것으로 추정했다. 2020년대 털사 남부 백인 다수 지역 빈곤율(13.4%) 대비 그린우드 지역 흑인 빈곤율이 33.5%에 달하고, 2020년 털사의 흑인 가구 중간소득(3만463달러)이 백인 가구(5만5,448달러)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평등지표 보고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주목받았다.
두 번째 소송을 제기한 직후인 2021년 5월 털사 인종학살 추모 행사에서 거리 퍼레이드에 나선 플레처(오른쪽)와 남동생 휴스 엘리스(왼쪽), 레시 랜들. AP 연합뉴스
변호인단은 사건 100주년을 앞둔 2020년, 민사 소멸 시효와 무관한 ‘공중 방해(Public Nuisance)’ 법리를 적용해 시 당국을 다시 법정에 세웠다. 공공의 권리나 복지, 안전을 침해하는 불법행위로 인해 ‘현재에도 지속되는 피해’에 대해 ‘방해 행위를 제거-교정하도록’ 하는 조항을 활용한 거였다. 변호인단은 털사 학살의 진상 은폐와 재건 방해, 이후 지속된 차별적 주택정책 등을 근거로 들었다. 소송 원고인 플레처와 남동생 휴스(Hughes Ellis, 2023년 별세), 플레처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난 레시 랜들(Lessie Randle)이 하원 청문회에서 증언한 것도 소송이 진행되던 중이었다. 플레처는 “나는 평생 매일 학살의 기억 속에서 살아왔다. 국가가 그 역사를 잊더라도 나는 잊지 않을 것이고, 잊을 수도 없다. 다른 생존자들도, 우리 후손들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플레처는 손자 아이크와 함께 2023년 자서전 ‘그들이 내 사연을 묻게 두지 마라(Don’t Let Them Bury My Story)’를 출간했다.
오클라호마주 대법원은 2023년 9월 그 소송도 최종 기각했다. ‘단발성 사건’에 공중 방해 조항을 적용하는 건 무리라 판단한 거였지만, 양상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수많은 '단발성 사건'을 법원이 감당하게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대법원은 “학살 사건의 여파로 그린우드 지역이 겪어온 지속적인 불이익은 법원이 아니라 정책 입안자들이 해결해야 할 세대-사회적 불평등”이라고 판결문에 덧붙였다. 하지만 바이넘(G.T. Bynum) 당시 시장은 “100년 전 범죄로 인해 현재 주민들이 재정적으로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 금전적 배상의 유일한 재원은 흑인을 포함한 모든 털사 주민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뉴욕의 기업가 겸 ‘비즈니스 포 굿 재단’ 자선가 에드 밋즌(Ed Mitzen)이 소송과 별개로 2022년 플레처 등 생존자들에게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플레처는 그 돈으로 혼자 기거하던 낡은 원룸을 떠나 요양원에 입소했다. 그는 소송에서 이겨 배상금을 받으면 하고 싶은 게 무척 많았다. 안경과 보청기를 맞추고, 새집과 새 옷도 사고, 무엇보다 간호사가 꿈인 증손녀의 대학 학비를 보태주고 싶어 했다. 유년시절 플레처의 꿈이 간호사였다. 털사 학살의 최고령 생존자 비올라 플레처는 저 소박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향년 111세로 숨졌다. 이제 남은 건 동갑인 랜들 한 명뿐이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미국 역사는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의 ‘재건 포고 오션릴게임 령’ 이후 약 15년을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라 구분한다. 비로소 노예가 아니라 ‘시민’이 된 흑인들이 학교에 가고, 선거에도 출마하고, 상품으로 뿔뿔이 팔려갔던 가족 친지가 다시 모여 소작농이나 임금노동자로 적으나마 자본을 축적하며 미래를 설계하던 시기.1877년 북부 연방군이 철수하자마자 남부 백인 사회는 그들의 '재건'을 본 골드몽사이트 격화했다. 인종 분리 차별의 ‘짐 크로 법’의 시대. 흑인들은 문해력 시험과 납세 이력 등 새로운 법-제도적 장애물에 가로막혀 투표권을 도로 빼앗겼고, 더는 소유물도 아니어서 더 무자비해진 KKK 등의 테러와 린치를 감당해야 했다. 1896년 연방대법원은 ‘분리하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판결로 그 차별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바다신2게임 인종주의 백래시는 민권법과 투표권법이 제정된 1960년대까지 사실상 적법하게 자행됐다.
오클라호마 털사(Tulsa)의 흑인 마을 그린우드(Greenwood)도 짐 크로 시대의 산물이었다. 1901년 동부 유전 개발로 급성장한 오클라호마는 1907년 주 승격과 동시에 짐 크로 법을 제정했고, 털사가 석유회사 본사와 금융기관 등이 밀집한 거 바다이야기디시 점도시로 흥성해지면서 흑인들은 변두리로 떨려났다. 그들이 주로 정착한 털사 북쪽 그린우드는, 이름과 달리 거의 황무지였다.
1905년 흑인 사업가 오타와 걸리(Ottawa W. Gurley, 1867~1935)가 간선철도(Frisco Railroad) 너머 그린우드 땅 약 5만 평을 매입했다. 그는 주택을 지어 흑인들에게 공급하고 자립 릴게임방법 정착금을 빌려줘 가게를 열고 농지를 개간하게 했다. 그렇게 점차 주민이 불어나고 종자상과 잡화상 등이 잇달아 생겨났다. 인디애나주립대 로스쿨 출신 흑인 변호사 J.B 스트래드퍼드(J.B. Stradford, 1861~1935)는 법률 사무소를 열고 객실 55개 규모의 근사한 호텔을 지었고, 사업가 사이먼 배리(Simon Berry)는 버스회사를 설립했다. 그들 소수의 비전과 헌신 덕에 그린우드는 1차대전 종전 무렵 극장과 은행, 레스토랑, 병원, 의상실과 양복점, 신문사 등 190여 개 사업장을 갖춘 주민 수 1만 명 규모의 자타 공인 ‘블랙 월스트리트’로 변신했다. 브루킹스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당시 그린우드 지구 내 화폐 순환 주기는 평균 19개월에 달했다. 돈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마을 안에서 상점-은행-부동산-교육투자 등으로 순환하며 반복적으로 가치를 창출했다는 의미다.반면 당시 백인 지역 사정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유가가 급락하면서 유정들이 놀기 시작했고, 전장에서 청년들이 돌아오면서 취업난은 더 가중됐다. 그들에게 그린우드는 눈엣가시였다.
백래시성 차별은 동기나 양상 면에서 전통적 차별과 사뭇 다르다. 일방적 권력관계에 기반한 전통적 차별과 달리 권력 재분배에 따른 위기감과 상실감(역차별 정서)으로 촉발되는 백래시성 차별은 기존 질서-기득권 회복이라는 명분에 시기심과 복수심까지 스며 더 격렬해지기 쉽다. “단일 사건으론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인종 폭력”이라 불리는 1921년 5월 31일의 ‘털사 인종학살’이 그렇게 시작됐다.
1921년 5월 31일 밤부터 시작된 16시간여의 학살-약탈로 폐허처럼 변한 그린우드 지구 풍경. 사건 전 그린우드는 미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번영한 흑인지구라는 명성과 더불어 '블랙 월스트리트'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Library of Congress
쌍방 인종 갈등이 빚은 '폭동'으로 규정된 그 사건은 근 100년 뒤 주 정부 진상조사 보고서를 기점으로 백인 폭도들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로 재정의되기 시작했다. '폭동'이었던 탓에 그린우드 주민들은 전 재산을 잃고도 보험금조차 받지 못했고, 이후 주요 상권은 백인들에게 넘어갔다. 사건 직후 폭동 가담자로 연행되는 흑인 주민들. tulsahistory.org
5월 30일, 19세 흑인 구두수선공(Dick Rowland)이 17세 백인 여성 엘리베이터 안내원(Sarah Page)을 성추행한 혐의로 체포됐다. 발이 미끄러져 가볍게 부딪친 게 전부여서 청년은 이내 석방됐지만, 흥분한 백인 군중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다. 그날 밤 그린우드로 몰려간 수천 명의 무장 폭도는 흑인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살해하고, 가게와 집들을 방화-약탈했다. 쌍발기가 소이탄을 퍼부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다음 날까지 약 16시간 동안 자행된, ‘전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그 만행으로 그린우드 35개 블록이 폐허가 됐다. 주택 등 건물 1,200여 채가 사라졌고 흑인 100~300명이 숨지고 8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백인 사상자는 극소수였지만 주방위군과 경찰은 쌍방 폭동으로 규정, 흑인 생존자 수천 명을 강제 연행해 수 주일 동안 감금하고 폐허 정비 등에 강제 동원했다. 마을 지도자들은 주동자로 몰려 재판을 받았지만 백인은 단 한 명도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피해액은 부동산 150만 달러와 동산 75만 달러(2024년 기준 약 4,000만 달러)로 추산됐다. 법-제도에 기반한 백래시성 차별과 폭력의 야만적 효과는 도드라진 소수를 분리-통제함으로써 소수집단의 결속력을 약화하고 저항-재건 의지를 ‘합법적’으로 좌절시킨다는 데 있다. 걸리 등 마을 지도자들은 빈손으로 마을을 떠나야 했고, 가족-재산과 희망까지 잃고 잔류한 생존자들은 상존하는 위협과 공포 속에서 항변은커녕 기억조차 억누르고 살아야 했다. 7세 소녀 비올라 플레처(Viola Fletcher)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오클라호마 코만치 카운티에서 소작농 부부의 8남매 중 둘째(차녀)로 태어난 플레처는 어머니-의붓아버지와 함께 그린우드로 이주해 성장했다. 썩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에겐 집과 일터가 있었다. 플레처는 온 주민이 함께 했던 교회 예배와 소박한 주말 가족 만찬 메뉴, 남매가 함께 거실에 모여 부르던 복음성가의 선율을 100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기억했다.
학살의 밤, 일가족은 거의 맨몸으로 집을 나와 북쪽 약 30마일 거리의 클레어모어(Claremore) 숲으로 피신했다. 어둠 속에서 보고 들은 연기와 화염, 전장을 방불케 하던 총성과 비명소리, 거리에 나뒹굴던 시신들. 함께 피신한 이웃들과 함께 플레처 일가는 반딧불이를 잡아 어둠을 밝히고, 토끼를 사냥해 끼니를 때우고, 두려움에 떨며 셋씩 무리 지어 숲속 간이 화장실을 다녔고, 얼마간 진정된 뒤부터는 떠돌이 천막살이를 하며 농업 노동자로 살아갔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목화 수확 등 일당벌이에 나섰던 플레처는 16세 무렵 언니와 함께 그린우드의 한 백인 잡화점에 취업했다. 그 무렵 그린우드 상권은 백인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전성기 그린우드 흑인들이 진입하지 못한 업종 중 하나가 보험업이었다. 위험 분산을 위해 전국 규모의 재보험 시스템에 의존해야 하는 보험업은 자본금 규모 등 허가 조건과 규제가 까다로웠다. 그래서 흑인들은 소규모 장례-생명보험 외에 재산 보험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건 후 백인 보험사들은 ‘폭동 내란 소요 사태로 인한 손실에 대해서는 보험금 지급을 거부할 수 있다’는 면책조항을 근거로 흑인들이 청구한 1,400여 건의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만 109세의 플레처가 손자 아이크 하워드와 함께 2023년 출간한 자서전 'Don't Let Them Bury My Story' 표지. 우측 상단의 여성이 젊은 시절의 플레처다. blackwallstreet.org
학살 100주년이던 2021년 5월 미 하원 사법 소위 청문회에서 플레처는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내 이웃들은 부자였다. 돈만 많았던 게 아니라 문화적으로, 공동체적 유산으로 우리는 풍요로웠다. 당연히 내 가족에게도 근사한 집이 있었다.(…) 그 모든 게 불과 몇 시간 사이 몽땅 사라졌다.”
플레처는 32년 결혼한 남편(Robert Fletcher)과 함께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로 이주해 2차대전 전시 조선소 용접 보조공으로 일했고, 가정폭력으로 이혼한 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시 털사로 귀향했다. 그는 백인 가정의 가사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전남편과 낳은 아들 등 2남 1녀를 혼자 부양했다. “백인 주인집 설거지를 하다가, 또 어린애를 재우다가, '어쩌면 그들(주인)도 내 유년기를 파괴한 이들 중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고 그는 2023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털사 학살은 근 100년간 ‘폭동(riot)’이었다. 오클라호마의 공립 역사 교과서는 그 사건을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찰은 공식 기록을 지웠고, 마을 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집단 매장된 희생자들도 잊혀갔다. 생존자들 역시 공포의 트라우마와 생존권이 담보된 사회적 압박 속에서 침묵하며 기억조차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사건은 잊힌 역사가 되어갔다.
1995년 4월, 미국과 전 세계를 경악게 한 오클라호마 폭탄테러가 터졌다. 그 사건과 후유증으로 신문이 도배되다시피 하던 그해 5월 31일, 그린우드 문화센터에서 조촐한 행사가 열렸다. 테러에 대한 전국적 관심을 촉매 삼아, 지역 시민 종교단체가 74년 전 사건 생존자와 후손 등을 초대해 마련한 ‘털사 폭동’ 희생자 추모행사였다. 참석자들은 센터 마당 한편에 작은 추모비도 세웠다. 그렇게 사건이 공론화되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청원이 시작되면서 주의회가 97년 진상조사 위원회를 발족했다. 위원회 공식 명칭도 ‘털사 인종 폭동 조사 오클라호마 위원회’였다. 3년 뒤 위원회는 ‘폭동’이 백인 폭도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방적인 '학살'이었고, 시당국과 경찰이 중요 문서들을 파기하는 등 사태의 진실을 고의 은폐해왔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법적 정의도 공적 보상도 이뤄지지 않은 만큼 생존자 및 후손에 대한 직접 배상과 보상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털사 폭동’은 그제야 ‘털사 학살’로 재규정되기 시작했다.
흑인 인권 법률가 등의 주선으로 2003년 당시 생존자 123명과 200여 명의 후손이 시당국을 상대로 첫 연방 소송(Deadmon v. City of Tulsa)을 제기했다. 지방-항소법원은 민권소송 소멸시효(2년)를 들어 소를 기각했고 2005년 연방대법원도 하급 법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꺼지는 듯하던 털사 학살의 법적 정의의 불꽃을 다시 지핀 게 2006년 플레처 등 고령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었다. 당시 106세 최고령 생존자 플레처는 털사 학살이 보고서로 정리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악몽으로 고통받는 개인의 현재진행형 비극이란 사실, 공소시효가 미치지 못하는 국가-공동체의 도덕적 의무가 얽혀 있는 미완의 정의란 사실을, 여러 인터뷰와 국회 증언 등을 통해 역설했다.
플레처는 평생 가난에 허덕이며 만 85세가 될 때까지 가사노동자로 일했다. 수많은 고용주가 연방법 상의 사회보장세(social security tax)를 납부하지 않아 연금 혜택도 못 받은 탓이었다. 그의 아들도, 중등 시절 ‘올 A 우등생’이었다는 손자(Ike Howard)도 학비가 없어 학교를 중퇴하고 군에 입대해야 했다. 그렇게 가난은 대물림됐다.개인과 가계의 자산 형성-축적 과정에 부동산 소유 여부가 결정적인 변수이며, 미국의 인종 차별적 주택 정책(Redlining) 등이 흑인 빈곤-대물림에 끼친 영향에 대한 저서와 논문은 넘쳐난다. 하버드대 주택 경제학자 네이선 넌(Nathan Nunn)은 털사 학살로 인해 2000년 기준 현지 흑인 주민이 주택을 소유할 확률이 26%P 감소한 것으로 추정했다. 2020년대 털사 남부 백인 다수 지역 빈곤율(13.4%) 대비 그린우드 지역 흑인 빈곤율이 33.5%에 달하고, 2020년 털사의 흑인 가구 중간소득(3만463달러)이 백인 가구(5만5,448달러)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평등지표 보고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주목받았다.
두 번째 소송을 제기한 직후인 2021년 5월 털사 인종학살 추모 행사에서 거리 퍼레이드에 나선 플레처(오른쪽)와 남동생 휴스 엘리스(왼쪽), 레시 랜들. AP 연합뉴스
변호인단은 사건 100주년을 앞둔 2020년, 민사 소멸 시효와 무관한 ‘공중 방해(Public Nuisance)’ 법리를 적용해 시 당국을 다시 법정에 세웠다. 공공의 권리나 복지, 안전을 침해하는 불법행위로 인해 ‘현재에도 지속되는 피해’에 대해 ‘방해 행위를 제거-교정하도록’ 하는 조항을 활용한 거였다. 변호인단은 털사 학살의 진상 은폐와 재건 방해, 이후 지속된 차별적 주택정책 등을 근거로 들었다. 소송 원고인 플레처와 남동생 휴스(Hughes Ellis, 2023년 별세), 플레처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난 레시 랜들(Lessie Randle)이 하원 청문회에서 증언한 것도 소송이 진행되던 중이었다. 플레처는 “나는 평생 매일 학살의 기억 속에서 살아왔다. 국가가 그 역사를 잊더라도 나는 잊지 않을 것이고, 잊을 수도 없다. 다른 생존자들도, 우리 후손들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플레처는 손자 아이크와 함께 2023년 자서전 ‘그들이 내 사연을 묻게 두지 마라(Don’t Let Them Bury My Story)’를 출간했다.
오클라호마주 대법원은 2023년 9월 그 소송도 최종 기각했다. ‘단발성 사건’에 공중 방해 조항을 적용하는 건 무리라 판단한 거였지만, 양상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수많은 '단발성 사건'을 법원이 감당하게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대법원은 “학살 사건의 여파로 그린우드 지역이 겪어온 지속적인 불이익은 법원이 아니라 정책 입안자들이 해결해야 할 세대-사회적 불평등”이라고 판결문에 덧붙였다. 하지만 바이넘(G.T. Bynum) 당시 시장은 “100년 전 범죄로 인해 현재 주민들이 재정적으로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 금전적 배상의 유일한 재원은 흑인을 포함한 모든 털사 주민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뉴욕의 기업가 겸 ‘비즈니스 포 굿 재단’ 자선가 에드 밋즌(Ed Mitzen)이 소송과 별개로 2022년 플레처 등 생존자들에게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플레처는 그 돈으로 혼자 기거하던 낡은 원룸을 떠나 요양원에 입소했다. 그는 소송에서 이겨 배상금을 받으면 하고 싶은 게 무척 많았다. 안경과 보청기를 맞추고, 새집과 새 옷도 사고, 무엇보다 간호사가 꿈인 증손녀의 대학 학비를 보태주고 싶어 했다. 유년시절 플레처의 꿈이 간호사였다. 털사 학살의 최고령 생존자 비올라 플레처는 저 소박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향년 111세로 숨졌다. 이제 남은 건 동갑인 랜들 한 명뿐이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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