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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예송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6-09-2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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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 -황룡촌에서 중앙군을 격파하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전적지 중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곳은 정읍 황토현, 장성 황룡촌, 공주 우금치, 장흥 석대들이다. 이중 중앙군과 맞서 승리한 유일한 전투 현장이 장성 황룡촌이다. 1894년 3월,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손화중·김개남 등과 함께 무장에서 봉기한 후 백산으로 이동한다. 백산에서 8천여 명의 농민들은 전봉준을 대장,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으로 하는 호남창의대장소를 결성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대장기에 새긴다. 동학농민군이 태인·고부 관아를 연이어 .령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관 이경호의 전라감영군을 진압군으로 보낸다. 그러나 전라감영군은 동학농민군에게 황토현에서 큰 패배를 당한다. 위기감을 느낀 조정은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앙의 정예부대인 장위영의 영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 진압을 명한다. 홍계훈은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 제물포를 출발, 군산에 상륙한 후 전주성에 입성한다. 전봉준은 중앙군과 곧바로 싸우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전주를 공격하는 대신 정읍·고부·흥덕·고창·무장·영광으로 이동하며 중앙군을 유인했다. 전주에 들어갔던 중앙군이 계획대로 농민군의 꽁무니를 따라 움직이자, 어디서든 격파해 그 예봉을 꺾고 전주를 。령하는 작전 계획을 수립한다. 그 최적 장소는 전주로 직행하는 길목인 장성이었다. 4월22일, 영광에 주둔하고 있던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장위영 대관 이학승과 원세록, 오건영 등에게 병력 300명과 대포 2문을 줘 장성으로 출발시켰고, 23일 장성 황룡에 머물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삼봉산 일대에 주둔한 후 장성 월평리 황룡장터에서 .심을 먹고 있었다. 농민군을 발견한 이학승이 대포를 발사해 농민군 40-50명이 사망하자, 농민군이 장태를 앞세워 공격하면서 양 진영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당시의 상황은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남긴 ‘양호초토등록’, 동학농민군 측 기록인 오하영의 ‘동학사’, 황현이 남긴 ‘오하기문’ 등에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다. 황현의 ‘오하기문’에는 다음처럼 기록돼 있다. “23일 홍계훈은 경군 200명(300명의 오기)을 선봉으로 삼아 영광으로부터 적(동학농민군)을 뒤쫓다가 다시 월평에 도착해 적진을 바라보니 적진은 채 정렬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다른 사람에 앞서 공을 세우고자 후원병을 기다리지 않고 멀리서 대환포를 쏘았다. 모바일 우주전함야마토릴게임 적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잠시 후 홀연히 커다란 대나무로 만든 통을 밀고 나왔는데, 둥그스런 닭의 집(장태)과 비슷한 것이 수십 개였다. 관군은 총탄을 쏘았지만, 대나무 통에 차단돼 버렸다. 이날 관군은 7명이 죽었으며, 대환포 2문을 빼앗겼고, 적은 서로 밟아서 많이 죽었고, 혹은 대환포에 맞아서도 죽었다.” 황룡촌 전투에 대한 기록은 입장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신무기 장태를 앞세워 중앙군을 물리친,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의 대승이었다. 이때 중앙군 선봉장 이학승과 5명(황현의 기록에는 7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대포 2문과 양총 100여 종, 그리고 많은 탄환을 빼앗긴다.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농민군이 대포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 중앙군을 격퇴한 장성 황룡촌 전투의 결과는 엄청났다. 승전 소식을 전해 들은 농민들이 대거 동학농민군에 가담하는 계기가 됐고, 농민군은 콧바람을 불며 전주성에 무혈입성한 후 집강소를 설치, 혁명 과업을 수행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장성 황룡촌 전적지에는 33m 높이의 죽창 모습과 장태를 굴리는 농민군을 조각한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이 서 있다. 장성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장성군 황룡면) -나주목사 민종렬과 담판을 벌이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이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중앙군을 격퇴하고 전주성에 입성한 것은 1894년 4월27일(음력)이었다. 이로써 전라도 일대 전역은 동학농민군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에게 함락되지 않은 두 곳이 있었다. 나주와 운봉(현 남원)이었다. 나주는 고려 현종 이후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의 핵심 거。이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함평에 진출했을 때 나주 목사 민종렬에게 편지를 보내 회유하지만, 민종렬은 “명분 없는 거사는 법에 의해 주륙돼야 하며 부도덕한 말은 듣고 싶지 않다”며 단호하게 거부한다. 당시 대부분의 수령이 농민군의 공격을 받으면 성을 버리고 도주했는데, 민종렬은 그들 과는 달리 수성군을 조직해 정석진을 도통장으로 삼고 동·서·남·북 4대 문에 각각 별장(別將)을 배치하는 등 농민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광주에 주둔한 손화중과 최경선이 이끈 농민군은 나주를 함락하기 위해 나주 수성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1894년 7월5일 전개된 서성문 전투, 10월21일의 광산구 하산동 침산 전투, 11월12일 광산구 용진산 전투, 11월24일 나주시 금안면 남산촌 전투 등이 그것이다. 바다이야기 환전 가능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나주 수성군의 신식 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연전연패했다. 전봉준이 입성했던 나주읍성 서성문 나주 수성군과 나주·광주 동학농민군의 최초 전투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1894년 7월 5일, 나주 서성문에서 벌어진다. 광주에서 활동하던 최경선이 농민군 수천을 거느리고 7월1일 나주로 내려오자, 나주 지역에서 접주로 활동하던 오권선 등이 금안동에서 최경선과 합류한다, 그리고 7월5일, 서성문을 공략했지만 실패한다. 나주 공략 실패는 이미 전주 등 대부분의 고을을 장악한 전봉준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전주 다음가는 요충지였던 나주가 공략되지 않는 한, 나주는 전봉준에게 “등에 찔린 가시 같고 눈에 박힌 바늘과 같은 곳”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8월13일, 전봉준이 직접 부하 10여 명을 이끌고 나주목사 민종렬과 담판을 위해 나주를 찾게 된 연유다. 서성문에 도착한 전봉준은 수문 별장에게 신분을 밝히고, 목사를 만나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때 전봉준의 태도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기록이 전한다. 하나는 나주 수성군의 입장에서 기록된 이병수의 ‘금성정의록’이다. ‘금성정의록’은 “전봉준이 민 목사를 만나 뵙고 사례를 하기 위해 왔다고 하자, 이에 수문 별장은 죽여버리자고 했으나, 민종렬이 ‘전시에 임해서 적을 죽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연민의 정을 빌기 위해 와서 청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무사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만류해 만남이 이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농민군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오지영의 ‘동학사’는 “전봉준이 곧바로 관아로 달려 들어가 자신이 전봉준임을 밝히자, 이에 당황한 민종렬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 기록 중 어떤 기록이 더 정확한 것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일반인들이 전봉준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의 여부였기 때문이다. 당시 전봉준은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바람과 구름을 타는 신출귀몰한 이인으로, 백성을 구하는 민중의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 전봉준이 나주읍성 서성문에 딱 하고 나타났으니, 나주 수성군은 놀라 자빠졌을 것이고, 민종렬 목사는 심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둘의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는 나주 목사 내아였다. 전봉준은 민종렬에게 전라감사가 집강소 설치를 인정했으니, 나주도 이에 응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민종렬은 이를 거부한다. 나주목사 내아 이 부분에 대한 기록도 앞의 두 책은 상반된다. 야마토3 릴게임 ‘금성정의록’은 “전봉준이 집강소 설치 얘기조차 꺼내지 못했으며, 민종렬이 진노하며 타이르자, 전봉준은 기가 질려 감히 말 한마디 못하다가 머리를 싸매고 도망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동학사’는 “민 목사가 전봉준의 기풍을 보고 간담이 서늘하여 말문이 막혀 감히 한마디도 항변할 수 없었으며, 오직 머리를 숙이며 전후 사유를 듣기를 청할 뿐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두 기록은 전혀 다르게 서술돼 있지만, 전봉준과 민종렬이 만나 농민군이 일어난 이유와 전주화약, 집강소 설치 등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았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는 결렬이었다. 전봉준은 민종렬과의 담판이 결렬되자, 하룻밤을 나주읍성에서 묵은 뒤 남문을 통해 빠져나간다. 하룻밤 묵었던 곳이 객사 금성관이라는 설도, 주막이라는 설도 있다. - 나주 초토영으로 끌려오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령한 후 청·일 양군이 개입하려 하자, 조정과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한다. 그런데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 。령하고 ‘개혁’을 빙자한 내정간섭을 일삼자, 다시 또 봉기한다. 이를 제2차 봉기라고 한다. 이때는 1차 봉기 때 비협조적이었던 최시형의 북접도 참여했다. 남·북접의 4만여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북상 중 공주 우금치에서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 및 일본군과 맞닥뜨린다. 관군의 총병력은 2천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2개 대대 병력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일주일간 50여 차례의 돌격을 감행했지만,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패퇴했고, 전봉준은 부하였던 김경천이 사는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 마을을 찾는다. 김경천은 전봉준의 목에 걸린 수천 냥의 상금에 눈이 멀어, 길가 주막으로 안내한 후 이웃 마을의 민병대장 한신현에게 밀고한다. 주막은 민병대에 의해 포위됐고, 담장을 뛰어넘던 전봉준은 체포된다. 이때가 1894년 12월2일(음력)이었다.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비(순창군 쌍치면)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전봉준 체포 소식을 접한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소좌가 달려와 순창군수를 협박해 전봉준의 신병을 확보한다. 미나미 소좌는 전봉준을 전주가 아닌 호남초토영이 있는 나주로 압송한다. ‘호남초토영’은 호남 지역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본부로 나주 목사 민종렬이 초토사였지만, 실질적인 지휘관은 미나미 소좌였다. 나주 초토영에 수감 중이던 전봉준은 1895년 1월5일 나주를 출발, 1월24일 서울 주재 일본영사관에 인도됐고, 평리원에 투옥된다. 그리고 3월29일 사형이 선고됐고, 다음날인 3월30(음력) 새벽 서울 전옥서에서 교수형이 집행된다. 그의 나이 막 40이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문이다.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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