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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일까, 그림일까. 낙서 같은 드로잉 사이로 인물과 동물, 사물이 뒤엉킨다. 카메라로 담아낸 장면이지만 실제 존재와 그려진 형상이 어우러져 비현실적인 풍경을 이룬다. 미국 출신 사진가 로저 발렌은 이처럼 사진과 드로잉의 경계를 허물며 인간 내면의 불안과 무의식을 탐구해왔다.
서울 종로구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열리는 ‘로저 발렌. 더 워크스: 드로잉 미츠 포토그래피(Roger Ballen. The Works: Drawing meets Photography)’는 사진과 드로잉의 결합을 중심으로 작가의 60여 년 작업을 조망한다. 196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 컬러 사진까지 사진·드로잉·에칭 등 130여 。을 일곱 개 파트로 나눠 선보인다.
Headless, Asylum of the Birds series, 2006, Inkjet print, 63×63cm, ⓒRoger Ballen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사진인 동시에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무엇”이라고 설명한다. 인물과 동물, 사물을 촬영하면서 벽의 그림과 선까지 화면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입체적인 존재와 평면의 드로잉이 한 장의 사진 안에서 얽히면서 무엇이 실재하고 무엇이 그려진 것인지 살피게 한다.
195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발렌은 심리학을 공부하고 지질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매그넘 포토스 뉴욕 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과 폴 스트랜드 등의 작품을 가까이서 접했다. 예술 사진을 정식으로 배우기보다 여행과 현장 경험으로 사진을 익혔고,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정착해 작업을 이어왔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지층을 따라 광산 갱도를 내려가는 일에 빗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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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위해 방한한 그는 “지질학자로 일할 때 지층을 따라 광산 갱도를 내려가듯이 내 작업에서도 정신의 여러 층을 지나간다”며 “깊숙이 묻혀 있던 조각들을 끌어올려 하나의 일관된 시각적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Otherworld, Roger's Rats series, 2016, Inkjet print, 45×45cm, ⓒRoger Ballen
드로잉과 사진을 잇는 실마리는 남아프리카 시골집의 벽에서 찾았다. 촬영하러 들어간 집에서 아이들이 그린 낙서를 발견한 그는 처음에는 이를 사진에 담다가 。차 벽의 흔적과 전선, 사물의 형태를 화면 구성에 활용했다. 이후 배경에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폴라로이드 사진 위에 드로잉을 더하는 등 두 매체의 결합을 실험했다.
전시는 이러한 변화가 초기 작업에서부터 어떻게 이어졌는지 보여준다. 1980∼1990년대 ‘도르프스(Dorps)’와 ‘플라틀란트(Platteland)’ 연작에서 작가는 남아공의 마을과 건축물, 실내 공간과 인물을 촬영하며 현실에서 발견한 패턴과 선, 형태를 조형 요소로 활용했다. 이어 ‘아웃랜드(Outland)’에서는 인물과 사물, 선과 그림을 직접 배치하면서 현실의 기록과 의도적인 연출이 교차하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2000년 이후의 ‘섀도 체임버(Shadow Chamber)’와 ‘보딩 하우스(Boarding House)’에서는 장면을 직접 구성하는 연출의 비중이 더욱 커진다. 인물과 사물뿐 아니라 배경의 선과 여백까지 세밀하게 조율한다. 현실에서 선과 형태를 발견하던 사진은 작가가 직접 만들고 조율하는 하나의 무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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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e, Theatre of Apparitions series, 2008, Lightbox panel, 130×130cm, ⓒRoger Ballen
‘어사일럼 오브 더 버즈(Asylum of the Birds)’와 ‘로저스 래츠(Roger’s Rats)’ 연작에서는 새와 쥐가 인간의 동반자로 등장한다. 얼굴에 드로잉을 입히거나 신체 일부만 드러낸 인물은 실체를 가늠하기 어렵다. 벽에 그려진 형상과 동물, 사물이 서로 닮은 형태로 어우러지고, 인물과 동물은 서로의 행동을 흉내 내는 듯 보인다. 동물은 단순한 소품이나 배경을 넘어 현실과 환상의 중간에 놓인 장면을 함께 구성한다.
이처럼 인간과 동물, 현실과 환상, 사진과 드로잉의 경계가 뒤섞이는 발렌의 독특한 시각 언어는 ‘발레네스크(Ballenesque)’라는 말로 불린다. 낯선 존재들이 뒤엉킨 화면은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그 바탕에는 선과 형태, 빛과 구도를 치밀하게 다루는 작가의 조형 감각이 있다.
‘시어터 오브 어패리션스(Theatre of Apparitions)’ 연작에서는 드로잉 자체가 촬영 대상이 된다. 작가는 어둡게 처리한 유리 표면을 긁거나 지워 선과 형상을 만든 뒤 이를 카메라로 촬영했다. 긁어낸 틈을 통과하는 빛과 짙은 어둠, 노출과 프레이밍이 어우러지면서 흔적은 정체 모를 환영으로 나타난다. 사진은 드로잉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이미지로 바꿔놓는다.
Thrown Out, Spirits and Spaces series, 2021, Inkjet print, 75×75cm, ⓒRoger B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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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흑백을 고수했던 작가는 ‘스피리츠 앤 스페이스(Spirits and Spaces)’ 연작에서 선명한 색을 끌어들였다. 이 가운데 ‘스로운 아웃’(Thrown Out)에서는 파란 옷을 입고 가면을 쓴 인물 곁에 흰 토끼가 웅크리고, 어두운 벽에는 여러 얼굴 형상이 보인다. 어두운 공간 속 파란 옷과 흰 토끼의 대비도 시선을 붙든다.
컬러 작업의 계기는 2016년 전후 영상 작업을 준비하던 중 찾아왔다.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다 우연히 얻은 컬러 이미지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스피리츠 앤 스페이스’를 중심으로 2020년 이후의 컬러 사진을 소개한다. 색은 주변의 선과 형태, 인물과 동물의 관계 속에서 화면의 긴장을 만드는 또 다른 조형 요소로 쓰인다. 작가는 “컬러 작업은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라기보다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했다. 색채가 더해져도 선과 형상, 인물과 사물의 관계를 통해 장면을 구성하는 작업 방식은 이어진다.
미술관 수장전시실에서는 폴라로이드 사진 위에 직접 물감으로 선과 색을 더한 작품과 에칭을 만날 수 있다. 폴라로이드 작업에서는 사진이 담은 구체적인 현실과 그 위에 더해진 허구의 형상이 충돌하고 결합한다. 에칭에서는 의인화된 동물과 기이한 형상들이 선으로 이어지며 독립적인 세계를 이룬다. 사진과 드로잉의 관계를 탐구해온 작가의 관심이 여러 매체로 뻗어나간 모습이다.
기묘한 장면의 의미를 하나로 풀어내기는 어렵다. 작품에 담긴 뜻을 묻자 작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관람객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라며 “나는 작품을 통해 관람객이 혼란을 느끼면서 동시에 혼란에서 벗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길 원하느냐는 질문에는 “심리적 작가. 인간 내면에 관한 작업을 하는 작가”라고 답했다. 전시는 내년 2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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