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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표는 길을 새긴 것이 아니라 표시한 것일 뿐. 물 위에는 끝내 길이 남지 않는다.
투어링 카약은 길고 좁다. 카약은 처음부터 한 사람을 위한 배였다. 북극의 사냥꾼이 나무 뼈대에 짐승 가죽을 꿰매 만들던 시절부터, 이 배는 딱 한 사람이 들어가 다리를 뻗으면 꽉 찼다. 콕핏이라 부르는 구멍에 다리부터 밀어 넣고 앉으면 뱃전이 허리에 감긴다. 스프레이 스커트를 펼쳐 그 틈을 막고 나면 배와 몸 사이에 물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러니 카약은 타는 배가 아니라 입는 배다. 사람이 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배를 몸에 꿰는 것이다.
배를 입고 엉덩이를 몇 번 들썩여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나는 다리 대신 배를 얻은 반인반선의 몸이 되었다. 노를 물에 넣고 당기면 당긴 만큼 배가 나간다.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기어도 연료도 변속도 없이, 어깨의 힘이 물의 저항과 직거래를 한다. 저은 만큼만 가고, 팔을 멈추면 배도 선다. 이보다 정직한 배는 없다. 처음에는 팔로 젓고, 조금 지나면 등으로 젓고, 나중에는 몸통이 통째로 비틀리며 젓는다. 그 단순한 반복이 자리를 잡으면 배는 물 위를 조용히 미끄러지고, 노가 물을 가르는 소리와 뱃머리에 갈라지는 잔물결 소리만 남는다. 머릿속도 노질의 박자만큼 단순해진다.
제주 해안에서 만난 거친 파도. 잔잔한 바다도 바람이 바뀌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다.
세상에서 가장 물에 가깝게 앉는 배
카약의 눈높이는 수면과 같다. 세상의 모든 배 가운데 물에 가장 가깝게 앉는 배다. 갑판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와 수면에서 마주 보는 바다는 다른 바다다. 파도는 풍경이 아니라 눈앞의 언덕이고, 물새는 위가 아니라 옆에서 난다. 바다는 해의 기울기에 따라 시시각각 물빛을 바꿨다. 아침의 물과 한낮의 물과 해 질녘의 물이 모두 다른 색이었다. 뭍에서는 한 가지 색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바다가, 수면에 앉은 눈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다시 칠해지는 화폭처럼 보였다. 뭍에서 여러 번 보아 온 제주도 또한 물에서 보니 처음 보는 섬이었다. 파도가 깎아 놓은 해안의 옆모습은 길 위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낮게 앉은 자에게만 보이는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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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카약 여행을 나섰을 때, 항로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해안선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초보 카야커다. 카약이 전복되면 뒤집힌 채로 물속에서 노를 크게 돌려 카약을 바로 세우는 기술을 롤링이라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것을 못 한다. 롤링은 본래 묘기가 아니라 북극의 생존술이었다. 얼음장 같은 바다 속에서 배를 벗으면 사람은 몇 분을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이누이트 사냥꾼들은 배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배를 입은 채로 몸째 한 바퀴 돌아 일어서는 법을 익혔다. 배가 옷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벗으면 죽는 옷. 나는 그 옷을 입는 법까지는 배웠지만, 그 옷과 한 몸으로 구르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카약이 전복되면 스스로 복원할 수 없으니, 나는 수평선 쪽으로 뱃머리를 돌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또한 파도치는 바다는 얼마나 무서운가. 거기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상상하면, 먼바다가 아무리 불러도 뭍에서 멀어질 수 없었다.
해변 방풍림에 차린 하룻밤의 야영지.
내가 만드는 물길, 감당하기 벅찬 절대 자유
해안선을 따라 한참 노를 저어 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반나절을 저어 온 물길이 흔적도 없이 닫혀 있었다. 걷는 사람의 뒤에는 발자국이 남고, 그 발자국이 쌓여 길이 된다. 노 젓는 사람의 뒤에는 물결 몇 번이면 지워지는 잔무늬뿐이다. 물에는 길이 없다. 길이 없으므로 모든 방향이 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전면적인 자유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바다는 동시에 길이 없는 세계였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은, 아무도 어디로 가라고 일러 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땅에서는 길이 나를 데려가지만 물에서는 내가 길을 그어야 한다. 그리고 그날 내가 바다 위에 그은 선은 해안선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내 겁이 만든 선. 뭍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느냐가 곧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두려움의 크기였다.
모래사장에 올려놓은 두 대의 투어링 카약.
물에 길을 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항로마다 부표를 띄우고 곶마다 등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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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것은 길을 새긴 것이 아니라 길을 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표는 이리저리 물결에 흔들리고, 등대의 불빛은 물 위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
태평양 마셜 제도의 뱃사람들은 너울이 섬에 부딪혀 굴절되는 무늬를 나뭇가지와 조개껍데기로 엮어 지도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지도는 배에 싣고 가는 물건이 아니었다. 떠나기 전에 눈과 손으로 외우고 몸에 새겨, 바다 위에서는 몸에서 꺼내 쓰는 것이었다. 땅에서는 길이 발밑에 있지만 물에서는 길이 언제나 사람 머릿속에 있다. 물의 길은 세상에 새겨지지 않고, 사람 안에 저장된다.
제주 해안에서의 야영. 카약과 캠핑 장비를 싣고 일주일간 섬을 여행했다.
5만 년 전, 인류의 첫 항해와 함께한 배
제주 바다는 더없이 잔잔했다. 햇살은 수면에서 잘게 부서졌고, 여기가 천국이 아니면 어디가 천국일까 싶은 풍경이 이어졌다. 그러나 노를 쥔 손은 알고 있었다. 이 바다가 지옥으로 바뀌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바람의 방향이 틀어지고 너울이 일기 시작하면, 방금까지 나를 어르던 물이 나를 삼키려 든다.
천국과 지옥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같은 곳에 있다. 같은 바다가 다르게 굴 뿐이다. 그래서 물 위의 평온은 언제나 조건부다. 카약을 젓는 사람의 평화는 방심의 평화가 아니라, 긴장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누리는 평화다. 그 긴장을 안은 채, 어느 하루는 딱 한 번 해안선을 벗어났다. 비양도 때문이었다. 협재 앞바다에 떠 있는 그 작은 섬은 눈앞에 빤히 보였다. 헤엄쳐도 닿을 것처럼 가까워 보이는 섬. 카약을 좀 타는 사람이라면 건넌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거리다. 그러나 내게는 아니었다. 해안을 등지고 뱃머리를 섬으로 돌리는 데에 나는 있는 용기를 다 끌어 모아야 했다. 발밑의 물이 깊어지고, 돌아보면 뭍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해협 한가운데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겁 많은 항해자였다. 그런데 인류가 처음 바다를 건넌 것도 꼭 그런 항해였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섬. 그러나 초보에게는 있는 용기를 다 끌어모아야 하는 해협이었다.
대략 5만 년 전, 지금의 동남아시아에서 사람들은 바다 건너로 보이는 섬을 향해 배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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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에 닿으면 그 섬에서 보이는 다음 섬으로. 그렇게 징검다리를 건너듯 바다를 건너 마침내 호주 대륙까지 닿았다. 무엇을 타고 건넜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뗏목이었을 수도, 속을 파낸 통나무였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도 눈앞의 그 좁은 해협이 목숨을 건 우주였으리라는 것이다. 수평선 위에 보이는 땅. 저기까지만 건너가 보자는 마음. 인류의 모든 항해가 그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뱃머리가 비양도의 물가에 닿았을 때 나는 어느 대륙에 처음 상륙한 사람처럼 잠시 숨을 골랐다. 협재의 그 짧은 해협이, 내게는 5만 년 전의 바다였다.
노를 저어 닿은 섬은 걸어서 닿은 섬과 같은 곳이 아니었다.
내 몸이 기억하는 항로
건너간 섬에서의 저녁이었다. 비양도에 하나뿐인 슈퍼는 문이 닫혀 있었다. 지나가던 주민이 일러 주었다. 주인이 뭍에 나갔다고. 마저 들어보니 제주도에 간 것이었다. 이 작은 섬에서는 제주도를 육지라 불렀다. 그날 나는 뭍이라는 말이 상대적인 방향이라는 것을 배웠다. 물에서 보면 모든 땅이 뭍이다. 노를 저어 물 위에 떠 본 사람은, 자기가 평생 발 딛고 살아온 세계가 실은 물에 둘러싸인 커다란 섬이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된다.
일주일간의 여정 동안 주로 해변의 방풍림 곁에 텐트를 쳤다.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는 소리, 방풍림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이윽고 텐트 천을 두드리기 시작한 빗소리. 바깥세상이 연주하는 거대한 오케스트라 속에서 나는 잠드는 것이 아까워 한참을 뭉그적대기 일쑤였다. 비바람이 치고 바깥 날씨가 아무리 궂어도 텐트 안은 아늑하기만 했다. 천 한 장이 그 사나운 바깥을 다 막아 주었다. 낮의 바다에서 배 한 척이 그랬듯이.
제주를 떠나는 날, 카약을 뭍에 댔다. 뱃머리가 모래에 닿는 둔탁한 마찰음으로 항해는 끝이 났다. 스커트를 벗기고 배에서 몸을 뽑아 일어서자 다리가 잠시 휘청했다. 물의 리듬에 맞춰져 있던 몸이 단단한 땅을 낯설어하는 것이다. 물 위에서 나를 태우고 다니던 배는 뭍에 오르는 순간 내가 끌어야 할 짐으로 바뀌었다. 배를 끌며 모래밭을 걸어 나오다 바다를 돌아보았다. 내가 저어 온 길은 이번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길을 기억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내 어깨였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화폭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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