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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에너미'의 주인공 커스틴 스토크만을 맡은 이봉련(왼쪽)과 문소리. 세종문화회관 제공
노르웨이 남부의 한 해안도시. 온천 담당 의사인 토마스 스토크만 박사는 온천 수질을 조사하다 유기물질에 오염됐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진실을 알리고 문제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시장인 형 페테르 스토크만은 도시 경제에 미칠 타격을 이유로 공개를 막는다. 스토크만은 연설로 대중을 설득하려 하지만 결국 공동체의 적으로 몰려 고립된다.
진실을 밝히려는 이는 반드시 선한가. 이를 배척하면 모두 부당한 가해자인가. 한 사람을 사회적 악당으로 내모는 것은 그의 행동인가, 그걸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의 집단 논리인가.
사실주의 연극의 토대를 다진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은 1882년 발표한 희곡 '민중의 적'에서 진실과 다수의 이해관계, 민주주의와 여론의 취약성을 파고들었다.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와 이익을 지키려는 다수의 현실주의자 간의 충돌은 140년 넘게 흐른 오늘날 현실에서도 종종 목도하게 된다. 이들 중 누가 진정한 빌런이며, 그 빌런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시장은 왜 진실을 막았나
연극 '에너미' 창작진. 왼쪽부터 번역과 윤색을 맡은 강훈구 작가, 이준우 연출가, 커스틴 스토크만 역의 배우 이봉련과 문소리, 데릭 역의 강신구.
'민중의 적'에서 가장 강력한 빌런은 시장 페테르다. 오염 문제를 바로잡으려면 하수설비와 송수관을 다시 놓아야 하고 2년 이상 소요될 공사 기간에 온천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 시장은 시민의 건강보다 온천 사업의 지속과 도시 경제, 자신의 명성을 앞세워 문제를 제기한 동생을 고립시키는 쪽을 택한다.
시장만 스토크만 박사를 막아서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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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공장 사장인 스토크만의 장인 모르텐 킬도 온천이 유해하다는 주장을 철회하라고 압박한다. 스토크만이 킬의 가죽공장을 최악의 폐기물 배출 장소로 지목한 데다, 딸 카트린에게 물려줄 유산을 몽땅 온천 주식에 투자해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스토크만을 지지했던 지역 언론 '민중의 전령' 편집인 호브스타드와 기자 빌링그도 신문 운영상 우려와 여론 추이에 따라 태도를 바꾼다. 시민들도 사업 중단으로 자신들이 입을 손해에 주목한다.
시장은 진실을 은폐하는 데 앞장서는 빌런이지만, 그를 움직이는 것은 개인적 야심만이 아니다. 사업에 생계를 걸고 있는 주민들의 불안, 투자금과 재산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계산, 여론을 따라 움직이는 언론이 그의 선택을 뒷받침한다. 시장의 결정 뒤에는 진실보다 이익을 앞세우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 제기자를 배척하는 사회의 논리가 자리한다.
스토크만도 완벽한 영웅은 아니다. 그는 자기주장이 옳다는 확신 속에 대중과 충돌하고 다수의 판단을 불신한다. 그가 오염 문제를 제기한 건 복수심 때문이고 월급을 올리려는 속셈이 있다는 비난도 받는다. 오늘날의 '메신저 공격'과 닮았다. 스토크만의 성격이나 설득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온천수가 오염됐다는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준우 연출가. 세종문화회관 제공
강한 사람은 홀로 서 있는 사람인가
연극 '에너미'의 주인공 커스틴 스토크만을 맡은 문소리(왼쪽)와 이봉련. 세종문화회관 제공
입센은 '민중의 적'을 완성한 뒤 출판업자 프레데리크 헤겔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토크만 박사와 자신이 "여러 문제에 관해 생각이 같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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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2년 에두아르트 마이스너라는 의사의 실제 경험에서 입센이 영감을 얻어 스토크만을 창조했다는 해석도 있다. 입센이 전작 '유령' 발표 뒤 도덕적 논란과 거센 비판에 직면했던 사실 역시 진실과 여론의 충돌을 다룬 이 작품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홀로 서 있는 사람이다." 작품의 마지막 대사는 고립된 스토크만이 도달한 결론을 압축한다. 다수의 지지를 잃었다고 해서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며, 혼자 남았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입센은 다수의 판단에 맞서는 용기와 신념을 의심하지 않는 완고함 사이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묻는다. 입센 자신도 다수의 의사에 좌우되는 조직을 경계하고 소수의 편에 서려 했던 작가였다.
사회가 공공의 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이 작품은 시대에 맞게 각색되며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국내에서도 서울시극단이 1998년 미국 작가 아서 밀러의 각색본을 토대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오슬로대 입센연구센터의 데이터베이스 입센스테이지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1기 출범 첫해인 2017년 북미에서는 '민중의 적'을 원작으로 8개 프로덕션이 무대에 올랐다. 2015년에는 2개였다.
두 무대에 돌아온 '민중의 적'
창작집단 양손프로젝트. 왼쪽부터 배우 양종욱, 양조아, 연출 박지혜, 배우 겸 연출 손상규. LG아트센터 제공
올가을 입센의 질문을 서울 무대로 옮긴 두 편의 공연이 잇달아 관객을 만난다.
서울시극단의 '에너미'(10월 26일~11월 14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는 스코틀랜드 극작가 키어런 헐리의 현대적 각색을 통해 여론이 한 사람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겹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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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천은 개장을 앞둔 대규모 워터파크 리조트로 바뀌었고, 형제의 대립은 자매의 대결로 재구성됐다. 의사 커스틴 스토크만은 단 24시간 만에 지지를 잃고 공동체의 적으로 낙인찍힌다. 신문 대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라이브 방송이 여론 형성의 무대가 된다. 문소리와 이봉련이 커스틴 역에 더블 캐스팅됐다.
연출자인 이준우 서울시극단 단장은 "'민중의 적'이 소수가 정보를 독.하는 시대가 배경인 것과 달리 '에너미'의 현대사회는 SNS로 누구나 진실을 알 수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라며 "하지만 현대사회는 개인의 안위와 이득을 위한 선택, 질투와 혐오하는 마음이 겹쳐 오히려 진실을 알기 어려워졌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각자가 내는 목소리의 힘을 잘 모으면, 누구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분열된 사회의 단면을 잘 다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작품 선택 이유를 설명했다.
연출 박지혜, 배우 손상규·양조아·양종욱 4인으로 구성된 창작집단 양손프로젝트의 '안티피플'(11월 20~29일 LG아트센터 서울 유플러스 스테이지)은 한 사람을 공동체의 적으로 만드는 사회의 작동 방식에 주목한다. 세 배우가 스토크만과 시장, 언론인, 시민 등 여러 인물을 넘나들며 온천수 오염을 둘러싼 대립을 펼쳐낸다. 누가 '피플'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누가 그 밖으로 밀려나는지, 한 사람을 '안티피플'로 규정하는 주체는 누구인지 질문한다.
두 공연은 140년 전 입센이 던진 질문을 오늘의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시장은 분명 빌런이었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우리 모두의 계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말하면 늘 환영받는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편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도 되는지, 예술은 무대 위에서 계속 묻는다.
만 박사는 온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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