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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대 교수 노신호 총선 출마기- 진정성 담긴 감동적 연설·언행- 유권자 마음 흔들며 지지 얻어- 자유당 관권 동원·마타도어에- 끝내 무너지고 마는 과정 그려
사랑을 고백했다가 퇴짜 맞는 것과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한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영국의 속담이다. 나림 이병주가 영국인 친구 프레데릭 조스 기자의 말이라며 자주 인용하는 대목이다.
이병주 작가가 경남 하동군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유권자에게 배포한 유인물이다. ‘국제신보(현재 국제신문)사 주필 겸 편집국장’ ‘부산초중고등학교 교원노 한국릴게임 조 및 각종 노동조합 고문(顧問)’ 등 경력을 명기해 진보·혁신 색채를 분명히 했다. ‘정치신념’ 항목에서 ‘제2공화국’(1960~1963)의 지향을 밝혀 1960년 7월 29일 선거로 보인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다 실패하는 건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다.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남 모바일릴게임 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하겠다는 건 엄청난 도전이다. 성공 확률도 높지 않다. 나림은 선거에서 남의 마음을 얻으려 두 번 출마했고, 두 번 낙선했다.
‘패자의 관’은 30대 중반 농과대학 교수 노신호의 낙선기다. 1954년 나림이 3대 총선에 출마했던 바로 그 이야기다. 노신호는 사실상 다 이긴 선거를 자유당의 관권 동원과 마타도어(근거 골드몽게임 없는 중상모략 또는 얼토당토않은 흑색선전) 탓에 패했다.
초반에 워낙 기세로나 매력으로나 압도적이어서 다들 따 놓은 당상으로 여겼다. 특히 합동 정견발표회 이후 노신호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여타 후보들이 대체로 고함만 크고 공소한 웅변을 하는 데 반해 차근차근한 어조로 소신을 우주전함야마토게임 밝혀나가는 연설은 단연 돋보였다. 여당 후보가 “우리는 지금 민도가 낮아 민주주의를 하지만 빨리 노력해서 우리도 제국주의를 해야 합니다. 제국주의를 해야 공산당을 때려잡을 것 아닙니꺼”라고 하는 정도인데, 노신호는 지성과 호소력에서 12명 후보 중 발군(拔群)이었다. 유세도 때와 장소와 상대에게 맞게 세심하고 진지하게 진행하자 식자는 식자대로 무식자는 무 바다이야기예시야마토게임 식자대로 감동했다.
▮공감 감동 인기 누명 상처
1957년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 현장을 당시 여당인 자유당 측 정치깡패가 덮쳐 아수라장이 된 모습.
특히 두 대목이 압권이었다. 우선, 군인들 앞에서 한 유세다. 연병장에 철모를 깔고 앉은 장병들에게 노신호는 준비한 연설문 대신 “정복을 하고 사는 인생이란 엄숙합니다.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인생이란 두렵습니다”라고 운을 떼고, 자신은 학병을 자원하여 치욕의 병정 생활을 했다고 자백하며 민족이 용서해 주어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이어 영예로운 군인 앞에서 감히 노예 군인 주제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마는 “꼭 하고 싶은 말은 어떠한 전투에도 이겨 남도록 자중하고 자애하란 것뿐입니다”라고 마무리했다. 연설이 끝난 후 박수가 일지 않았다. 실패한 연설인가 하는 순간 단에서 내려오는 노신호를 군인들이 환성을 지르며 둘러쌌다.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더러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다음, 나병환자촌에 가서 한 유세다. “세상에서 격리되어 이곳에 살고 있는 여러분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찾아볼 생각 위문할 엄두도 없이 늘 피해 다니다가 표를 얻으러 나타난 저는 뻔뻔한 놈이니 적당히 취급해 주십시오”라고 서두를 하고, 서정주의 시 ‘문둥이’의 “꽃같이 붉은 눈물”이란 대목을 감동적으로 설명했다. 이어 “여러분은 육체의 병을 고통하는 과정에 꽃같이 붉은 눈물을 흘리며 건강을 찾을 순 있는데 건강한 사람 가운덴 정신이 썩어가는 경향이 많습니다. 인생은 병이 들어도 아니 병이 걸렸기 때문에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확실히 죽음은 정신을 집중하게 만든다. 단일 투표구 300여 명 유권자의 9할이 노신호에게 투표했다.
중반 들어 교묘한 방해가 시작된다. 지리산 지역은 아직 산에 빨치산이 출몰하는 곳이다. 빨갱이라고 낙인찍히면 설 자리는커녕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1등으로 달리는 노신호는 빨갱이란 누명을 쓰고 고군분투하지만, 상황은 점입가경 설상가상이다. 선거 사무장은 체포되고, 운동원들은 열심히 하는 순서대로 붙잡혀 갔으며, 차량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선거 사흘 전 새벽 ‘노신호 동무를 대한민국 국회로 보내자’라는 삐라(심리전 전단지)가 ‘재산(在山) 빨치산 일동’ 또는 김일성이라는 서명으로 고을마다 골목마다 하얗게 뿌려졌다. 정말 악랄한 조작이다.
▮재도전과 단념, 젊은 날의 불행
1956년 대통령·부통령 선거 때 신익희·장면 후보의 포스터. 국제신문 DB
선거는 흐름이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왔던 흐름이 어이없이 가버리자 도저히 되찾을 길이 없었다. 노신호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노신호를 아끼는 노인들이 나서서 “우선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냐”라며 노신호 찍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고 다닐 지경까지 되었다. 거기에 더해 무더기 표를 투표함에 집어넣는 행태까지. 노신호는 3등으로 낙선했다. 그런 악조건에서 그만한 표를 얻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지만 떨어진 건 떨어진 것이다.
사람은 두 부류다. 실패하면 시들어가는 사람과 실패할수록 커가는 사람이다. 노신호는 선거를 스포츠의 정치적 표현으로 여겨 패배를 배우는 훈련으로 여겼다. 낙선을 구김살 없이 수용하며 “나는 말만 했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실적이 없었다. 내가 실적이 있었더라면 어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표를 찍어줬을 것이다. 그처럼 곤욕 치르면서도 이 정도 표를 주었으니 우리 국민은 위대하다”고 했다.
패배에서 배우는 역량과 천품을 지닌 노신호는 게으름 없이 공부하고 활달하게 지냈지만 한 번 찍힌 빨갱이 낙인 탓에 4대 총선엔 아예 출마조차 하지 못했다. 4·19 후 5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자유 분위기가 조성되어 이번엔 당선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또 고배를 마셨다.
이번엔 상대의 선전 선동이 더 교묘해졌다. 이미 찍힌 빨갱이 낙인 위에 애국자란 프레임마저 씌었다. 노신호를 굉장한 애국자라고 하는 근거로 6·25 전란 때 많은 부역자를 잡아 당국에 넘겼고 보도연맹 관련자를 처치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소리지만, 부역 경력자나 보도연맹 유족을 찾아 음밀(陰密)한 시늉을 하며 속삭이니 어떠했겠는가. 고을의 생리를 잘 아는 자들의 고약한 역선전은 노신호의 결정적 패인이 되었다. 노신호는 낙선도 낙선이지만 거듭된 중상과 모략에 충격받았고 그런 모략에 넘어간 선거구민들에게도 환멸을 느껴 정치를 단념했다. 공사장 날품팔이를 전전하다 금호동 판자촌에서 죽었다. 아직 마흔 초반이었다.
▮나림의 실제 삶 반영
세상에 “면” 자가 들어가면 안 되는 일이 없다. “그때 조금 더 부지런했더라면” “돈이 더 있었더라면” “솔직하게 마음을 열었더라면” 등등 한도 끝도 없다. “면”을 계속하다 보면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만약 나림이 국회의원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국회의원 이병주’, 물론 가보지 않은 길이다. 다만 나는 나림이 의원을 했더라도 적어도 으스대거나 공적 이익을 사적으로 전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가혹한 법률을 없애고, 부역이나 연좌만큼은 구제하려 진력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국회의 빛이 되었겠으나 다선으로 권력을 만끽하기보다는 애써 힘든 일을 하다가 좌절하여 정계를 떠났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거에서 좋은 사람 뽑다가는 아무도 못 뽑는다, 결국 좋은 사람은 없고 유용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 유용성마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따지고 들면 답이 없다.
외류(外流)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중심에 서는 일은 없다. 설령 나림이 정치인이 되었더라도 “그거 해보니 시시해서 그만뒀다”며 툭툭 털고 자유롭고 분방하게 재야인(在野人)으로 지냈을 것 같다. 나림 스스로는 ‘패자의 관’이라도 씌어주고 싶었으나 그 결론은 노신호의 비문(碑文)인 뱅자맹 콩스탕의 시다. “아마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죽는다. 그럼 마찬가지 아니냐.”
승자의 관을 썼든 패자의 관을 썼든 이 세상에 패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어떻게 장식해도 죽음은 결정적인 패배다. 대영웅도 대천재도 대정치가도 한 번은 패자가 된다. 그리고 영원히 패자로 남는다. 우리가 고인의 무덤가에 모여 잔치를 벌이는 덧없는 행락은 살아 있기 때문의 주책이기도 하지만 머잖아 죽어갈 사람들의 촌가(寸暇)의 푸념이기도 하다.
천부의 재능과 성실과 의욕을 갖고도 패자의 길을 끝내 걷지 않을 수 없었던 노신호. 나림은 애틋하고 쓰린 마음으로 그의 정열과 허망을 기록했다. 바로 자신의 낙선기다. ‘패자의 관’, 1971년 7월호 ‘정경 연구’에 실린 단편이다.
※특별후원 : BNK금융그룹 기자 admin@no1reelsite.com
사랑을 고백했다가 퇴짜 맞는 것과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한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영국의 속담이다. 나림 이병주가 영국인 친구 프레데릭 조스 기자의 말이라며 자주 인용하는 대목이다.
이병주 작가가 경남 하동군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유권자에게 배포한 유인물이다. ‘국제신보(현재 국제신문)사 주필 겸 편집국장’ ‘부산초중고등학교 교원노 한국릴게임 조 및 각종 노동조합 고문(顧問)’ 등 경력을 명기해 진보·혁신 색채를 분명히 했다. ‘정치신념’ 항목에서 ‘제2공화국’(1960~1963)의 지향을 밝혀 1960년 7월 29일 선거로 보인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다 실패하는 건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다.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남 모바일릴게임 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하겠다는 건 엄청난 도전이다. 성공 확률도 높지 않다. 나림은 선거에서 남의 마음을 얻으려 두 번 출마했고, 두 번 낙선했다.
‘패자의 관’은 30대 중반 농과대학 교수 노신호의 낙선기다. 1954년 나림이 3대 총선에 출마했던 바로 그 이야기다. 노신호는 사실상 다 이긴 선거를 자유당의 관권 동원과 마타도어(근거 골드몽게임 없는 중상모략 또는 얼토당토않은 흑색선전) 탓에 패했다.
초반에 워낙 기세로나 매력으로나 압도적이어서 다들 따 놓은 당상으로 여겼다. 특히 합동 정견발표회 이후 노신호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여타 후보들이 대체로 고함만 크고 공소한 웅변을 하는 데 반해 차근차근한 어조로 소신을 우주전함야마토게임 밝혀나가는 연설은 단연 돋보였다. 여당 후보가 “우리는 지금 민도가 낮아 민주주의를 하지만 빨리 노력해서 우리도 제국주의를 해야 합니다. 제국주의를 해야 공산당을 때려잡을 것 아닙니꺼”라고 하는 정도인데, 노신호는 지성과 호소력에서 12명 후보 중 발군(拔群)이었다. 유세도 때와 장소와 상대에게 맞게 세심하고 진지하게 진행하자 식자는 식자대로 무식자는 무 바다이야기예시야마토게임 식자대로 감동했다.
▮공감 감동 인기 누명 상처
1957년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 현장을 당시 여당인 자유당 측 정치깡패가 덮쳐 아수라장이 된 모습.
특히 두 대목이 압권이었다. 우선, 군인들 앞에서 한 유세다. 연병장에 철모를 깔고 앉은 장병들에게 노신호는 준비한 연설문 대신 “정복을 하고 사는 인생이란 엄숙합니다.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인생이란 두렵습니다”라고 운을 떼고, 자신은 학병을 자원하여 치욕의 병정 생활을 했다고 자백하며 민족이 용서해 주어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이어 영예로운 군인 앞에서 감히 노예 군인 주제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마는 “꼭 하고 싶은 말은 어떠한 전투에도 이겨 남도록 자중하고 자애하란 것뿐입니다”라고 마무리했다. 연설이 끝난 후 박수가 일지 않았다. 실패한 연설인가 하는 순간 단에서 내려오는 노신호를 군인들이 환성을 지르며 둘러쌌다.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더러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다음, 나병환자촌에 가서 한 유세다. “세상에서 격리되어 이곳에 살고 있는 여러분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찾아볼 생각 위문할 엄두도 없이 늘 피해 다니다가 표를 얻으러 나타난 저는 뻔뻔한 놈이니 적당히 취급해 주십시오”라고 서두를 하고, 서정주의 시 ‘문둥이’의 “꽃같이 붉은 눈물”이란 대목을 감동적으로 설명했다. 이어 “여러분은 육체의 병을 고통하는 과정에 꽃같이 붉은 눈물을 흘리며 건강을 찾을 순 있는데 건강한 사람 가운덴 정신이 썩어가는 경향이 많습니다. 인생은 병이 들어도 아니 병이 걸렸기 때문에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확실히 죽음은 정신을 집중하게 만든다. 단일 투표구 300여 명 유권자의 9할이 노신호에게 투표했다.
중반 들어 교묘한 방해가 시작된다. 지리산 지역은 아직 산에 빨치산이 출몰하는 곳이다. 빨갱이라고 낙인찍히면 설 자리는커녕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1등으로 달리는 노신호는 빨갱이란 누명을 쓰고 고군분투하지만, 상황은 점입가경 설상가상이다. 선거 사무장은 체포되고, 운동원들은 열심히 하는 순서대로 붙잡혀 갔으며, 차량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선거 사흘 전 새벽 ‘노신호 동무를 대한민국 국회로 보내자’라는 삐라(심리전 전단지)가 ‘재산(在山) 빨치산 일동’ 또는 김일성이라는 서명으로 고을마다 골목마다 하얗게 뿌려졌다. 정말 악랄한 조작이다.
▮재도전과 단념, 젊은 날의 불행
1956년 대통령·부통령 선거 때 신익희·장면 후보의 포스터. 국제신문 DB
선거는 흐름이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왔던 흐름이 어이없이 가버리자 도저히 되찾을 길이 없었다. 노신호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노신호를 아끼는 노인들이 나서서 “우선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냐”라며 노신호 찍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고 다닐 지경까지 되었다. 거기에 더해 무더기 표를 투표함에 집어넣는 행태까지. 노신호는 3등으로 낙선했다. 그런 악조건에서 그만한 표를 얻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지만 떨어진 건 떨어진 것이다.
사람은 두 부류다. 실패하면 시들어가는 사람과 실패할수록 커가는 사람이다. 노신호는 선거를 스포츠의 정치적 표현으로 여겨 패배를 배우는 훈련으로 여겼다. 낙선을 구김살 없이 수용하며 “나는 말만 했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실적이 없었다. 내가 실적이 있었더라면 어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표를 찍어줬을 것이다. 그처럼 곤욕 치르면서도 이 정도 표를 주었으니 우리 국민은 위대하다”고 했다.
패배에서 배우는 역량과 천품을 지닌 노신호는 게으름 없이 공부하고 활달하게 지냈지만 한 번 찍힌 빨갱이 낙인 탓에 4대 총선엔 아예 출마조차 하지 못했다. 4·19 후 5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자유 분위기가 조성되어 이번엔 당선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또 고배를 마셨다.
이번엔 상대의 선전 선동이 더 교묘해졌다. 이미 찍힌 빨갱이 낙인 위에 애국자란 프레임마저 씌었다. 노신호를 굉장한 애국자라고 하는 근거로 6·25 전란 때 많은 부역자를 잡아 당국에 넘겼고 보도연맹 관련자를 처치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소리지만, 부역 경력자나 보도연맹 유족을 찾아 음밀(陰密)한 시늉을 하며 속삭이니 어떠했겠는가. 고을의 생리를 잘 아는 자들의 고약한 역선전은 노신호의 결정적 패인이 되었다. 노신호는 낙선도 낙선이지만 거듭된 중상과 모략에 충격받았고 그런 모략에 넘어간 선거구민들에게도 환멸을 느껴 정치를 단념했다. 공사장 날품팔이를 전전하다 금호동 판자촌에서 죽었다. 아직 마흔 초반이었다.
▮나림의 실제 삶 반영
세상에 “면” 자가 들어가면 안 되는 일이 없다. “그때 조금 더 부지런했더라면” “돈이 더 있었더라면” “솔직하게 마음을 열었더라면” 등등 한도 끝도 없다. “면”을 계속하다 보면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만약 나림이 국회의원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국회의원 이병주’, 물론 가보지 않은 길이다. 다만 나는 나림이 의원을 했더라도 적어도 으스대거나 공적 이익을 사적으로 전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가혹한 법률을 없애고, 부역이나 연좌만큼은 구제하려 진력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국회의 빛이 되었겠으나 다선으로 권력을 만끽하기보다는 애써 힘든 일을 하다가 좌절하여 정계를 떠났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거에서 좋은 사람 뽑다가는 아무도 못 뽑는다, 결국 좋은 사람은 없고 유용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 유용성마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따지고 들면 답이 없다.
외류(外流)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중심에 서는 일은 없다. 설령 나림이 정치인이 되었더라도 “그거 해보니 시시해서 그만뒀다”며 툭툭 털고 자유롭고 분방하게 재야인(在野人)으로 지냈을 것 같다. 나림 스스로는 ‘패자의 관’이라도 씌어주고 싶었으나 그 결론은 노신호의 비문(碑文)인 뱅자맹 콩스탕의 시다. “아마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죽는다. 그럼 마찬가지 아니냐.”
승자의 관을 썼든 패자의 관을 썼든 이 세상에 패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어떻게 장식해도 죽음은 결정적인 패배다. 대영웅도 대천재도 대정치가도 한 번은 패자가 된다. 그리고 영원히 패자로 남는다. 우리가 고인의 무덤가에 모여 잔치를 벌이는 덧없는 행락은 살아 있기 때문의 주책이기도 하지만 머잖아 죽어갈 사람들의 촌가(寸暇)의 푸념이기도 하다.
천부의 재능과 성실과 의욕을 갖고도 패자의 길을 끝내 걷지 않을 수 없었던 노신호. 나림은 애틋하고 쓰린 마음으로 그의 정열과 허망을 기록했다. 바로 자신의 낙선기다. ‘패자의 관’, 1971년 7월호 ‘정경 연구’에 실린 단편이다.
※특별후원 : BNK금융그룹 기자 admin@no1reelsi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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